서로 다른 지역의 부흥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20세기 초 세계 기독교 역사에는 흥미로운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1903년 한국 원산에서 부흥운동이 시작되었고, 1904년에는 웨일스, 1905년에는 인도 북동부의 카시 구릉과 서부의 묵티 선교공동체, 1906년에는 인도 미조 지역과 미국 로스앤젤레스, 1907년에는 평양, 1908년에는 만주, 1909년에는 칠레에서 큰 신앙운동이 일어났다. 몇 년 사이 유럽과 아시아,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여러 교회가 부흥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관심을 끈다.
이 부흥들은 단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었을까? 역사적 기록에는 실제로 한 지역의 소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고, 선교사와 현지 신자들이 그곳을 방문하고, 책과 편지가 국경을 건너간 과정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하나의 부흥이 세계의 모든 부흥을 차례로 발생시켰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몇 가지 분명한 연결고리를 따라가면서, 독립적으로 준비되어 있던 지역 교회들이 어떻게 서로의 소식과 경험을 나누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그 연결망의 한 중심에 웨일스가 있었다. 웨일스의 영향이 어떻게 인도에까지 이르렀는지 이해하려면 1904년 부흥보다 훨씬 앞선 종교개혁 이후의 역사를 먼저 보아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웨일스에 형성된 신앙의 토양
16세기 종교개혁은 웨일스에도 깊은 변화를 가져왔다. 1530년대 영국의 종교개혁과 함께 웨일스는 영국 국교회 체제 안으로 들어갔으나,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웨일스어와 영어 중심의 종교 제도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1567년 웨일스어 신약성경, 1588년 웨일스어 성경전서의 출판은 주민들이 자기 언어로 성경을 읽고 들을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 후 웨일스어 설교와 찬송, 종교 문학, 신앙교육은 여러 세대에 걸쳐 발전했다.[1]
17세기에는 윌리엄 로스(William Wroth), 월터 크래독(Walter Cradock) 등 청교도 설교자들과 비국교도 신자들이 성경 중심의 설교와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1639년 란바헤스(Llanvaches)에서 초기 독립교회가 조직된 일은 웨일스에서 국교회 밖의 개신교 공동체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국교회와 비국교도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지만 회중교회, 침례교를 비롯한 여러 신앙 전통이 웨일스 사회에 뿌리내렸다.[2]
18세기에는 더욱 뚜렷한 부흥운동이 등장했다. 1735년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와 대니얼 롤런드(Daniel Rowland)는 각각 깊은 신앙적 변화를 겪고 설교와 권면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활동은 처음에 서로 독립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이후 협력하면서 웨일스 여러 지역의 신앙운동으로 발전했다. 윌리엄 윌리엄스 판티셀린(William Williams Pantycelyn)은 찬송을 통해 이 운동에 기여했다. 신자들이 함께 성경을 배우고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모임인 세이아다우(seiadau)는 부흥운동이 지속적인 공동체 생활로 이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운동에서 발전한 칼빈주의 감리교는 1811년 자체적으로 목회자 안수를 시작했고, 1823년에는 독자적인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웨일스 장로교회로 발전한 이 전통은 예배당, 주일학교, 성경교육뿐 아니라 해외선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40년 해외선교회가 조직되고 이듬해 토머스 존스(Thomas Jones)가 인도 카시 구릉으로 파송된 일은 훗날 세계 부흥운동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3]
1859년에는 웨일스에서 다시 큰 신앙운동이 일어났다. 다비드 모건(Dafydd Morgan) 등의 활동을 통해 확산된 이 운동의 기억은 교회와 가정, 신앙모임 안에 남았다. 따라서 1904년 웨일스 부흥은 아무런 선행 역사 없이 갑자기 나타난 사건이 아니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성경 중심 신앙, 18세기의 부흥과 교단 형성, 19세기의 신앙운동과 해외선교가 축적된 토양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904년 웨일스 부흥과 세계로 전해진 소식
1904년 웨일스의 새로운 신앙운동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다. 뉴키(New Quay)에서 조지프 젠킨스(Joseph Jenkins) 목사가 섬기던 교회 청년들의 기도와 신앙적 각성이 먼저 알려졌고, 세스 조슈아(Seth Joshua)의 사역과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의 활동이 주목받으면서 부흥의 소식이 확산되었다. 특히 그해 가을 로어(Loughor)에서 열린 로버츠의 집회는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웨일스 부흥을 로버츠 한 사람이 시작하고 조직한 운동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기도와 집회가 이어졌으며, 지역 목회자들과 평신도, 여성과 청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의 신문과 종교 간행물은 부흥의 소식을 해외로 전했고,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다른 지역 신자들에게 소개했다.[4]

웨일스 부흥이 국경을 넘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미 형성되어 있던 선교 네트워크였다. 웨일스 선교회는 인도 북동부에서 오랫동안 교회를 세우고 현지 전도자를 양육하고 있었다. 새로운 부흥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곳에는 이를 듣고 기도할 현지 교회와 지도자들이 존재했다. 이처럼 세계적인 교류는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선교 관계 위에서 이루어졌다.
한눈에 보는 주요 부흥운동의 연결
당시의 국제적인 관계를 살펴보면 모든 부흥을 하나의 중심에서 출발한 연쇄운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중요한 연결 경로는 대체로 세 갈래로 정리된다. 웨일스와 인도 카시·미조 지역의 관계, 웨일스·인도 묵티와 칠레 사이의 관계, 그리고 한국 원산·평양과 중국 만주 사이의 관계다. 다음 도식은 단순히 연도가 비슷하다는 이유가 아니라 선교 관계, 방문, 책과 편지, 집회 증언 등 구체적인 전달 방식이 확인되는 경로만을 표시한 것이다.
카시와 미조는 현재 인도 북동부에 있는 지역이며, 묵티는 인도 서부 케드가온의 선교공동체를 가리킨다. 웨일스는 영국의 구성국 가운데 하나이고, 만주는 중국 동북부 지역이다. 지도상의 거리는 멀었지만 당시 선교사와 현지 신자들이 보낸 편지, 인쇄물, 현장 방문이 이 지역들을 연결했다.
웨일스에서 인도 카시·미조 지역으로
웨일스와 인도 카시 지역의 관계는 1905년에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 1841년 토머스 존스가 카시 구릉에 도착한 이래 웨일스 선교사들과 현지인 목회자·교사·전도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교회를 세웠다. 1904년 웨일스 부흥 소식이 카시 교회에 전해졌을 때, 그곳의 신자들은 자기 지역에서도 신앙의 갱신을 바라는 기도에 참여했다. 1905년 카시 구릉 여러 곳에서는 기도와 찬송, 죄의 고백이 이어지는 부흥운동이 나타났다.
이 소식은 다시 인도 북동부의 미조 지역으로 전해졌다. 미조 지역에도 웨일스 장로교 선교회의 사역을 통해 형성된 교회들이 있었다. 1906년 미조 신자들이 카시 지역의 집회를 직접 방문했고, 귀환한 뒤 자신들이 보고 들은 일을 전했다. 1906년 봄 미조 지역에서는 기도와 찬송, 회개운동이 나타났으며, 카시의 노래를 미조어로 옮기는 과정도 이루어졌다. 이 관계는 단순한 동시 발생이 아니라 방문자와 귀환 후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실제적인 연결이었다.[5]

특히 이 과정은 선교사들의 국제 교류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카시와 미조의 현지 신자들이 다른 지역을 방문하고 자기 언어로 경험을 전했다. 웨일스에서 시작된 해외선교 관계가 인도 안에서 현지 교회들 사이의 교류로 발전한 것이다.
인도 묵티에서 칠레로 이어진 서신과 저술
웨일스 부흥 소식은 인도 북동부뿐 아니라 서부의 묵티(Mukti) 선교공동체에도 전해졌다. 묵티는 판디타 라마바이(Pandita Ramabai)가 여성과 소녀들의 교육과 보호를 위해 세운 공동체였다. 1905년 라마바이는 웨일스 부흥의 소식을 접하고 특별기도를 조직했다. 카시 지역의 부흥 소식도 전달되면서 공동체 안에서 기도와 전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해 6월에는 묵티의 기도회에서 강렬한 종교적 반응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6]

묵티의 이야기가 칠레와 연결된 과정에는 구체적인 인물과 책이 등장한다. 묵티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 미니 에이브럼스(Minnie F. Abrams)는 자신이 경험하고 연구한 성령세례와 부흥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1906년에는 이를 『성령과 불의 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Ghost and Fire)라는 책으로 펴냈다. 에이브럼스는 1907년 과거 시카고에서 알고 지냈던 메이 후버(May Hoover)에게 이 책을 보냈다.
메이 후버는 칠레 발파라이소의 감리교 선교사 윌리스 후버(Willis C. Hoover)의 아내였다. 부부는 인도에서 전해진 보고와 책을 읽고 교회에서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1908년 말부터 활발해진 교회의 기도운동은 1909년 발파라이소의 부흥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이후 칠레 초기 오순절교회의 형성과도 관련되었다.[7]

이 사례에서 인도 묵티와 칠레의 연결은 단순히 두 지역에서 비슷한 체험이 있었다는 정도가 아니다. 에이브럼스의 책이 1907년 메이 후버에게 전달되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칠레 교회에 이미 존재하던 신앙생활과 기도의 역사를 함께 보아야 하지만, 국제적 영향이 어떤 사람과 매체를 통해 전달되었는지는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시기인 19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아주사 거리 부흥이 일어났다. 아주사 운동은 미국 성결운동과 찰스 파함, 윌리엄 시모어의 사역을 직접적인 역사 배경으로 갖고 있었다. 아주사의 소식도 이후 인도에 전해졌지만, 1905년에 이미 시작된 묵티 부흥을 1906년 아주사의 결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칠레 부흥의 직접적인 연결을 설명할 때는 묵티에서 후버 부부에게 전달된 책과 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원산에서 평양을 거쳐 만주로
동아시아의 부흥운동은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었다. 1903년 한국 원산에서는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 사이에서 회개와 기도운동이 일어났다. 원산의 사경회와 기도운동은 다른 지역에서도 이어졌고, 1907년 평양에서 큰 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발생 순서다. 원산 부흥은 1904년 웨일스 대부흥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웨일스와 카시 지역의 부흥 소식이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전해졌고 부흥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부흥의 시작과 발전을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성경공부와 회개운동이 한국 교회 안에서 이어져 1907년 평양에 이르렀다는 역사적 연속성이 중요하다.[8]

평양의 신앙운동은 다시 만주의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조너선 고포스(Jonathan Goforth)는 1907년 한국을 방문해 부흥운동을 살펴본 뒤 그 경험을 중국의 교회에 소개했다. 1908년 1월에는 랴오양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조지 더글러스(George Douglas)가 중국인 전도자 두 사람을 평양으로 보내 실제 집회를 살펴보게 했다. 이들은 귀환하여 자신들이 경험한 일을 전했고, 이후 랴오양 등 만주 지역에서 부흥집회가 이어졌다.[9]
평양과 만주의 관계는 방문자의 존재와 방문 시기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국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 중국인 전도자들의 직접 방문과 귀환 보고를 통해 다른 지역 교회로 전달되었다. 이는 당시 세계 부흥운동의 흐름이 서양 선교사들 사이의 정보 교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시아 교회와 현지인 전도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각 지역을 이어 준 사람들과 기록
1903년부터 1909년까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난 부흥운동을 함께 살펴보면 역사적 연결은 세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웨일스에서 인도 카시와 미조 지역으로 이어진 관계에서는 수십 년간 유지된 해외선교와 현지 신자들의 방문이 중요했다. 묵티에서 칠레로 이어진 관계에서는 한 여성 선교사의 저술과 오랜 개인적 교류가 중심적인 연결고리였다. 원산에서 평양, 다시 만주로 이어진 관계에서는 사경회와 교회 간의 교류, 직접적인 현장 방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흥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일은 사건을 단순히 연도순으로 나열하는 것과 다르다. 누가 어떤 소식을 들었고, 누가 어느 지역을 직접 방문했으며, 어떤 책과 편지가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할 때 사건 사이의 실제 관계가 드러난다.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교회들은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편지와 인쇄물, 방문과 선교 관계를 통해 세계적인 교류망 안에 놓여 있었다. 20세기 초 부흥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지역적 경험과 국제적 전달이 만나는 과정 속에서 전개되었다.
각주 및 주요 사료
웨일스 국립도서관, 1588 Welsh Bible. 종교개혁 이후 웨일스어 성경 출판과 신앙문화의 발전에 관한 자료다.↩
United Reformed Church in Wales, The History of Tabernacle, Llanvaches. 1639년 초기 독립교회 조직과 윌리엄 로스의 사역에 관한 기록이다.↩
Presbyterian Church of Wales, Our History; Dictionary of Welsh Biography, Dafydd Morgan. 1735년 부흥과 1811년 안수, 1823년 신앙고백, 1840년 해외선교회 조직 및 1859년 부흥에 관한 배경이다.↩
W. T. Stead, Mr. Evan Roberts (1905); People's Collection Wales, The last revival meeting conducted by Evan Roberts in Anglesey, 4 July 1905. 로버츠와 웨일스 여러 지역의 부흥집회에 관한 당대 증언·사진 자료다.↩
Lawmsanga, A Critical Study on Christian Miss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Presbyterian Church of Mizoram, University of Birmingham, 2010, 학위논문, 135~136쪽 부근. 1906년 카시 지역 방문단이 미조로 돌아와 부흥 소식을 전달한 과정을 분석한다.↩
Jan-Peter Suarsana, Of Culture and (Indian) Nation: The Mukti Revival in Colonial Discourse (2025). 웨일스·카시 부흥 소식과 묵티 공동체의 국제적 관계 및 역사 보고를 연구한다.↩
Gary B. McGee, Abrams, Minnie F. (1859–1912), Boston University. 에이브럼스의 저술과 1907년 메이 후버에게 책을 보낸 사실을 기록한다.↩
김칠성, 「평양대부흥에 대한 재고」, 『대학과 선교』 39, 2019. 1903년 원산 부흥의 연속성과 웨일스·카시 부흥의 영향에 대한 해석을 검토한다.↩
이덕주, 「1908년 만주 부흥운동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 28, 2008. 평양 방문과 만주 부흥 사이의 직접적인 방문자·선교사 교류를 살펴본다.↩
부흥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