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14 · 역사·신학 주제 연구

부흥 이후의 문제를 되짚어 보다

역사적 부흥운동에 나타난 분열과 변질,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

웨일스·케인리지·아주사·칠레·동아프리카 등의 사례를 통해 부흥의 은혜와 인간의 실패를 구별하고, 교리의 진리와 교회의 신실한 책임을 살펴봅니다.

부흥운동사 · 부흥 이후의 교회 · 역사적 사례와 참고문헌 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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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부흥의 은혜와 인간의 실패

교회는 오랫동안 부흥을 사모해 왔다. 부흥은 죄에 무감각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붙들며, 교회가 말씀과 기도와 거룩한 삶으로 돌아가는 은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 여러 부흥운동에서는 신앙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고,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갈등이 화해로 이어졌으며, 선교와 구제와 교육을 위한 헌신이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 속의 몇몇 중요한 부흥 사례를 살펴보면 또 하나의 사실이 드러난다.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심각한 교리적 오류에 빠지기도 했고, 동역자들이 서로 갈라서기도 했으며, 회개와 거룩함을 강조하던 공동체가 도리어 다른 신자들을 정죄하고 통제하는 집단으로 변하기도 했다. 복음의 능력을 힘 있게 전했던 지도자들이 노예제나 인종적 차별에 연루된 사례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곳에서 왜 이러한 실패가 일어났는가? 부흥의 지도자에게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면 그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회심과 변화도 모두 부정해야 하는가? 부흥 이후의 분열을 막으려면 교리적 차이를 내려놓고 일치를 추구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실제적인 은혜의 역사와 그 은혜가 나타났다고 보고된 역사적 부흥운동, 그리고 그 운동을 이끌거나 계승한 인간 지도자와 조직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역사는 참되고 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신자도 이 땅에서 여전히 죄와 싸우는 존재다. 더욱이 부흥운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실제로 중생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지도자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그 지도자의 모든 교리와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지도자의 잘못이 드러났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선포한 복음을 통해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신앙까지 부정할 수도 없다. 따라서 부흥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실패는 부흥 자체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부흥으로 이해하며 그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존해야 하는지 더욱 진지하게 살펴야 할 이유가 된다.

2. 부흥의 역사에 나타난 분열과 변질

2.1. 교리적 혼란과 지도자의 권위 남용: 웨일스 칼빈주의 부흥

1735년부터 시작된 웨일스 칼빈주의 부흥은 하월 해리스와 대니얼 롤런드, 윌리엄 윌리엄스 등의 사역을 통해 확산되었다. 이들은 죄인의 회심과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전하며 여러 지역에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그러나 부흥의 중심 인물이었던 해리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동역자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표현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모라비아 형제단의 영향과 지도권을 둘러싼 갈등도 심해졌다.

특히 해리스가 시드니 그리피스라는 여성에게 특별한 예언과 영적 분별의 은사가 있다고 믿고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일은 동역자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의 관계를 실제 성적 부정행위로 확정할 충분한 증거는 없지만, 사적인 관계와 특별한 영적 권위에 대한 주장이 공적인 사역과 결합하면서 신뢰가 흔들린 것은 분명하다. 결국 1750년 해리스와 롤런드의 관계는 분열에 이르렀다. 다만 이 갈등은 영구적인 단절로 끝나지는 않았고, 해리스는 1762년부터 다시 옛 동역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

이 사건은 부흥운동의 지도자라는 지위가 교리적 검증이나 도덕적 책임에서 누구도 면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강력한 영적 체험과 탁월한 설교 능력이 지도자의 모든 판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특히 자신에게 특별한 영적 권위가 있다고 확신할수록 다른 사람의 권면을 거부하고 자신의 사적인 판단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할 위험이 커진다.

2.2. 부흥 경험 이후의 신학적 이탈: 케인리지 부흥

1801년 미국 켄터키의 케인리지 부흥에서는 여러 교단의 목회자들이 함께 설교했고, 많은 사람이 회개를 구했다. 그러나 집회에서 나타난 격렬한 신체적 현상과 그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다. 부흥의 확산과 함께 구원론과 교회 권위에 관한 기존의 신학적 갈등도 더욱 뚜렷해졌다.

이후 바턴 스톤을 비롯한 일부 목회자들은 기존 장로교회의 관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운동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 참여했던 리처드 맥네머와 존 던래비는 후일 셰이커 공동체로 옮겨 갔다. 셰이커 운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주요 교리와 다른 가르침을 전했다. 물론 스톤 자신이 셰이커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며, 이들의 신학적 변화를 모두 케인리지 집회의 직접적인 결과로 설명할 수도 없다.2

이 사건의 모든 갈등을 부흥운동 자체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당시에는 기존 교회 지도자들의 대응과 교리적 논쟁, 교회 권위의 문제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이후 매우 다른 신학적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할 문제다.

종교적 체험은 강렬할 수 있지만, 그 강렬함이 체험에 대한 해석의 진실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부흥의 경험이 바른 교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특별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현상에 대한 모든 신학적 설명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2.3. 인종적 장벽과 지도권 갈등: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

1906년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은 흑인 설교자 윌리엄 시모어의 사역을 중심으로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고 기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종적 분리가 일상화되어 있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모습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운동이 확산되면서 지도권과 교리적 해석, 인종적 태도를 둘러싼 갈등이 나타났다. 시모어와 그의 스승 찰스 파함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파함은 아주사의 집회 방식과 인종 간 교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시모어의 사역에 참여했던 여러 지도자와 집단도 교리와 조직, 지도권을 둘러싸고 갈라섰다. 아주사에서 나타났던 인종 간 공동체의 이상이 후대 오순절 교회들에서 동일하게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3

물론 아주사 부흥 이후의 모든 교단적 분리를 단순한 권력욕이나 인종차별의 결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성령론과 성화론, 교회 조직에 관한 신학적 차이도 존재했다. 그러나 부흥 초기에 강조되었던 형제애와 공동체적 일치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도자의 이해관계와 인종적 편견 앞에 흔들렸다는 사실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일치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그 구성원들의 편견과 권력욕까지 자동으로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신앙적 갱신은 예배의 열심뿐 아니라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공동체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2.4. 부흥 이후에도 반복된 교회 분열: 칠레 부흥

1909년 칠레 부흥에서도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둘러싼 갈등이 기존 감리교회와의 분리로 이어졌다. 윌리스 후버와 그를 따르는 신자들은 성령의 역사와 신앙적 체험을 강조했으나, 기존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운동의 가르침과 집회 방식, 교회 질서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 과정에는 신학적 판단뿐 아니라 지도권과 교회 행정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었다.

결국 새로운 감리교 오순절교회가 형성되었고, 이 교회는 활발한 거리 설교와 평신도들의 참여를 통해 성장했다. 그러나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지도권과 교회 조직의 문제를 경험했다. 특히 1932년에는 큰 분열이 일어나 별도의 복음주의 오순절교회가 형성되었다.4

처음의 분리가 기존 교회의 부당한 대응 때문이었다고 판단하더라도, 새로운 공동체가 그 자체로 모든 문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후대의 분열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처음의 모든 신앙적 경험을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부흥의 열심으로 형성된 교회라 할지라도 바른 교리와 책임 있는 지도력, 정당한 교회 질서를 지속적으로 세워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2.5. 거룩함을 향한 열심이 외적 규율로 변할 때: 동아프리카 부흥

동아프리카 부흥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문제가 나타났다. 발로콜레(Balokole)로 알려진 신자들은 죄의 고백과 배상, 거룩한 삶과 공동체적 교제를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물던 교회를 새롭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관계를 회복하려 했으며, 공동체 안에서 더욱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공동체에서는 거룩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옷차림과 머리 모양, 재산과 부채에 관한 외적인 규율로 좁아졌다. 1960년대에는 이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심해졌다. 지도자 페스토 키벵게레는 형제들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가 두려움으로 바뀌고, 그리스도보다 외적인 관습을 앞세우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5

이러한 변화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명하며, 실제적인 회개와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특정한 생활규칙을 참된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거나, 그 규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영적으로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때 처음에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된 노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던 공동체가 점차 자신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에 영적인 우월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사례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분열의 원인도 동일하지 않았다. 어떤 갈등에는 중요한 교리적 문제가 있었고, 어떤 갈등에는 지도자의 권력욕이나 사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했다. 기존 교회의 부당한 대응이 갈등을 심화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분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한쪽을 정죄하거나 모든 분리를 잘못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에는 공통된 위험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확신이 점차 자신과 자기 집단의 판단도 특별한 권위를 지닌다는 확신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부흥의 열심은 오히려 새로운 교만과 분열의 원인이 된다.

3. 복음의 능력을 전하면서도 남겨진 도덕적 모순

3.1. 휘필드와 에드워즈의 노예제 연루

부흥의 역사에서 가장 무겁게 다루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복음의 은혜를 강력하게 선포했던 지도자들이 노예제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지 휘필드는 대서양 양편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중생의 필요성을 힘 있게 설교했다. 그는 노예 소유자들의 잔혹한 학대와 흑인에 대한 종교교육의 방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베데스다 고아원의 재정적 안정을 위해 노예노동을 이용했으며, 조지아에서 노예제의 합법화를 지지했다. 그가 사망한 뒤 작성된 재산 목록에는 노예 신분에 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6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노예를 소유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참된 회심을 설명하는 데 탁월한 신학적 유산을 남겼지만, 노예 소유를 정당화하는 입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노예무역의 잔혹성과 부당한 강제 예속을 비판했으나, 그러한 비판을 노예 소유 자체에 대한 일관된 반대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반면 그의 아들 조나단 에드워즈 2세와 제자 새뮤얼 홉킨스는 노예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7

이들의 모든 신학적 공헌을 노예제 문제 하나로 무효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신학적 공헌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중대한 도덕적 잘못을 축소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를 단순히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라고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당시에도 노예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존재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드러난다. 사람은 자신이 옳게 고백하는 교리를 실제 삶의 특정 영역에는 충분히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지위가 위협받는 문제에는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옳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순종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3.2. 부흥이 사회적 죄를 자동으로 제거하지는 않는다: 남아프리카 부흥

남아프리카 부흥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견된다. 1860년 부흥은 교회의 기도와 선교적 헌신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지만, 당시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지니고 있던 인종적 차별을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이 교회는 부흥이 일어나기 전인 1857년 총회에서, 인종을 구별하지 않는 공동의 성찬이 원칙적으로 성경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부 백인 신자들의 편견과 반발을 고려해 별도의 성찬 시행을 허용했다. 이러한 결정은 이후 인종별로 구분된 교회 조직이 형성되는 과정과 연결되었다.8

1860년 부흥이 훗날의 인종분리 체제를 직접 만들어 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흥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고백한 교회가 이미 존재하던 인종적 차별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복음으로 새로워졌다는 고백과 그 복음이 교회의 실제 질서에 적용되는 문제 사이에 심각한 간격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교회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교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교회가 재정이나 권력의 문제에서는 정직하지 못할 수 있고, 성경적 권위를 강조하는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거부할 수도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면서도 약한 사람의 고통이나 부당한 처우를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른 교리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고백하는 교리를 자신의 삶과 공동체 전체에 충분하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바른 교리와 거룩한 삶은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다.

4. 이러한 실패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4.1. 부흥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죄의 잔재가 남아 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반복된 문제를 단순히 잘못된 집회 방식이나 지도자 개인의 성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 근원에는 타락한 인간의 죄성과 영적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교회가 지도력과 권위를 다루는 태도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먼저 부흥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도 죄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참으로 중생시키신 신자도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에 이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에게 더 이상 심각한 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이해와 맞지 않는다. 더욱이 부흥운동에는 실제로 중생하지 않았으면서 외적인 열심과 감정적인 체험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단지 인간이 여전히 연약하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부흥을 경험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그 위험은 더욱 커진다.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거나 다른 신자를 쉽게 정죄한다면, 부흥의 경험 자체가 새로운 교만의 근거로 변할 수 있다.

4.2. 영적 체험을 성경보다 높은 권위에 두려는 유혹

또 하나의 근원적인 문제는 영적인 체험을 성경보다 높은 권위에 두려는 유혹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특별히 말씀하셨다는 확신이나 강렬한 종교적 감정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면, 그 경험을 성경으로 검증하려는 시도조차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반대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자신이 영감하신 성경의 진리와 모순되는 새로운 복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성경은 영들을 시험하라고 명하며(요일 4:1), 사도가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갈 1:8).

따라서 부흥을 사모하는 교회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구하면서도 그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르침과 행동을 성경에 비추어 분별해야 한다. 부흥의 경험이 성경의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가 부흥이라고 주장되는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4.3.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지도자를 절대화하는 위험

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 역시 문제의 중요한 근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만, 어떤 사람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 무오한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성과가 특정 지도자의 명성과 결합하면, 지도자를 비판하는 일이 곧 부흥을 비판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때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역사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 그 결과 지도자의 사적인 판단이 공적인 신앙의 기준처럼 받아들여지고, 교회의 정당한 권면과 권징은 약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흥을 경험한 교회일수록 지도자의 가르침과 생활을 살피고, 상호 권면과 교회의 정당한 권징을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5장 2–3절은 장로들에게 맡겨진 양 무리를 돌보되 지배하려 하지 말라고 명한다. 부흥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권면을 받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지위가 아니라, 자신 역시 말씀과 교회의 정당한 질서 아래 있다는 겸손한 인식이다.

4.4. 은혜로 시작한 삶을 외적 규율로 완성하려는 태도

은혜로 시작한 신앙생활을 자기 의와 외적인 규율로 완성하려는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고백 방식과 기도 습관, 생활규칙을 더 높은 영적 수준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이때 거룩함을 향한 열심은 다른 신자를 정죄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실제적인 거룩함과 공동체가 형성한 특정한 생활규칙을 구별해야 한다. 참된 성화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령을 의지하며 죄와 싸우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물론 거룩함은 실제적인 행동을 요구하며, 교회는 신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죄를 권면하고 필요한 경우 권징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명하지 않은 규칙을 절대화하거나 외적인 순응을 중생의 확실한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로 완성하려는 태도를 책망한다. 이 경고는 부흥의 경험을 가진 공동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신앙생활을 자신이 세운 기준에 대한 순응으로 완성하려 한다면, 그 공동체는 점차 복음의 자유보다 사람의 판단을 더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4.5.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향력을 구하는 마음

이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과 자기 공동체의 영광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다. 부흥의 영향력이 커지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명성과 영향력, 조직과 권위를 지키려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시작한 사역이 점차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고 보호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부흥의 지도자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기뻐할 수 있고,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더 큰 부흥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다. 또한 부흥의 성과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된 통계를 발표하거나, 지도자의 잘못을 숨기거나, 정당한 문제 제기를 공동체의 일치를 해치는 행동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결국 부흥의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뒤 그 은혜를 자신의 소유처럼 여기기 시작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명성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삼을 때, 부흥의 은혜는 인간의 교만으로 가려지기 시작한다.

5. 부흥과 교회의 일치: 교리적 타협이 해결책은 아니다

5.1. 모든 분열을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부흥의 역사에서 분열이 반복되었다는 이유로 교리적 차이를 내려놓고 일치를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교회의 분열은 슬픈 일이지만, 모든 분리가 동일하게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자존심이나 권력욕, 사소한 관습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분열은 회개해야 할 죄일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 진리가 부정되거나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상황에서 진리를 지키기 위한 분별과 필요한 분리까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진리를 보존할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을 포기하면서까지 외형적인 일치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복음의 본질에 속하며, 무엇이 중요한 교회적 신앙고백과 질서에 관련되고, 무엇이 신자들 사이에서 인내하며 논의할 수 있는 문제인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속죄와 칭의 같은 복음의 핵심 진리를 둘러싼 논쟁과 개인적인 지도권 경쟁 때문에 발생한 갈등은 성격이 다르다.

또한 모든 교리적 차이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모든 차이를 똑같이 심각한 이단적 오류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신앙고백의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상대방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5.2. 진리 없는 연합도, 교만한 분열도 경계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의 하나 됨을 중요하게 가르치지만, 그 일치는 진리를 떠난 일치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구하셨다. 진리와 거룩함은 교회의 일치와 경쟁하는 가치가 아니라, 참된 일치가 이루어지는 토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위험을 함께 경계해야 한다. 하나는 교리적 차이를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종교적 체험이나 공동의 목적을 근거로 신학적 일치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외형적으로는 폭넓은 협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지만, 복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지켜야 할 교회의 책임을 약화할 위험이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문제를 복음의 본질처럼 취급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정죄하면서 분리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 역시 교회를 해칠 수 있다. 자신의 판단을 성경의 진리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면, 진리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인간의 교만을 정당화하게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진리를 약화하는 연합도,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되는 교만한 분열도 아니다. 성경의 진리를 분명히 고백하면서 사랑과 겸손으로 교제를 지키는 교회다. 바른 교리를 지키는 일과 온유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진리를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며,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은 다른 사람을 멸시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6. 오늘날 부흥을 기대하는 교회가 각오해야 할 일

6.1. 부흥을 기대하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부흥의 역사에서 얻는 교훈은 단지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오늘날 부흥을 사모하는 교회라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구하는 동시에 그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존할 것인지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부흥을 원하는 마음이 설교의 내용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강한 감동을 경험하게 하는 메시지보다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회개와 믿음, 칭의와 성화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해야 한다. 특별한 역사에 대한 기대 때문에 성경의 불편한 진리를 축소해서는 안 되며,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이유로 복음의 본질을 바꾸어서도 안 된다.

6.2. 지도자의 영향력보다 말씀과 교회의 질서를 신뢰해야 한다

부흥의 지도자보다 말씀과 교회의 정당한 질서를 신뢰해야 한다. 부흥운동을 이끄는 지도자 역시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 생활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교회 안에는 재정과 사역, 중요한 결정에 대한 책임성과 상호 권면이 존재해야 한다. 누구도 자신이 부흥을 이끌고 있다는 이유로 성경적 검증과 정당한 권징에서 면제될 수 없다.

부흥은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폐기하는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 바른 권징을 더욱 진지하게 회복하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의 특별한 은사나 영향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교회가 함께 책임을 나누고 서로 권면할 수 있는 질서는 유지되어야 한다.

6.3. 회심의 숫자보다 지속적인 신앙의 열매를 살펴야 한다

부흥의 열매를 단순히 회심의 숫자나 집회의 규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곧 목회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회심을 고백한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가정과 일터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죄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오랫동안 살펴야 한다.

회심의 진정성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께 속하지만,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준에 따라 신앙고백과 삶의 열매를 살피고 신자들을 지속적으로 양육해야 한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면서 죄인들이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는 신앙적 위로를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참된 회심자로 단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믿고 그 위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는지 살폈으며, 세례 이후에도 성경교육과 목회적 돌봄을 계속했다.

부흥의 열기가 지나간 후에도 신자들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다. 교회는 특별한 집회의 감동을 유지하려는 데 힘을 쏟기보다, 그리스도께 돌아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거룩한 삶을 지속하도록 돕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6.4. 회개와 성화를 외적인 기준으로 축소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한 죄의 고백과 배상은 중요하지만, 모든 죄를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하도록 요구하거나 개인적인 상처와 고통까지 죄의 고백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가 있는 문제에서는 단순한 용서의 선언으로 책임을 덮어서는 안 되며, 피해자의 보호와 정당한 책임의 이행이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특정한 생활양식이나 외적인 규칙을 따르는 것을 참된 중생의 절대적인 증거로 삼아서도 안 된다. 회개와 성화의 열매는 실제적인 삶에서 드러나지만, 그 판단의 기준은 공동체의 독특한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6.5. 자기 교회와 지도자의 죄를 더욱 엄격하게 살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죄를 지적하는 데 익숙할 수 있지만, 자신의 공동체 안에 있는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데에도 성실해야 한다. 교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자신이 고백하는 교리를 경제적 문제와 성적 윤리, 이웃에 대한 사랑, 교회 권력과 재정의 문제에도 적용해야 한다.

노예제를 비판하는 역사적 성찰이 오늘날의 교회와 아무 관계 없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시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영역에서 성경의 진리를 외면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바르게 고백한다는 사실이 그 진리를 실천할 책임을 가볍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6.6. 부흥의 열기가 지나간 뒤에도 신실하게 사역해야 한다

부흥의 열기가 약해진 뒤에도 신실하게 사역할 각오를 해야 한다. 집회에서 나타난 특별한 감동과 열심이 언제까지나 동일한 모습으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가 지나간 뒤에도 교회는 말씀을 전하고, 새 신자를 교육하며,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죄 가운데 있는 신자를 권면해야 한다.

특별한 체험을 재현하기 위해 자극적인 방법을 찾거나 과거의 부흥을 반복적으로 연출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상적인 은혜의 방편에 충실해야 한다. 부흥 이후의 신실한 목회와 제자훈련은 부흥의 감동에 비해 덜 주목받을 수 있지만, 교회가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데 필수적이다.

6.7.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부흥이 자신에게 명예와 영향력을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부흥은 지도자의 성공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며, 특정 교회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역사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통해 은혜를 베푸실 때에도 그것을 기뻐해야 하고, 자신에게 크고 눈에 띄는 성과를 허락하지 않으시더라도 맡겨진 말씀과 기도와 전도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부흥을 기다리는 교회의 중요한 각오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은혜가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결단이어야 한다.

7. 부흥을 분별하는 궁극적인 기준

이러한 역사적 성찰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론과도 연결된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에서 참된 은혜의 경험과 단순한 종교적 감정을 구별하려 했다. 그는 강렬한 감정과 특별한 신체 반응, 열심 있는 종교적 언어가 그 자체로 참된 은혜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 그리고 실제적인 거룩함과 순종을 강조했다.

특히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감정의 가장 중요한 증거로 지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제시했다. 한때 나타난 열심보다 삶 전체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순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이러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중생 여부를 오류 없이 최종적으로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9

그런데 에드워즈의 이 신학적 통찰을 평가할 때 그의 노예제 연루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가 제시한 신앙의 기준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신학자의 명성보다 성경의 진리를 더 높여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들의 신학적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무오한 신앙의 모범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잘못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통해 선포된 복음의 진리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모든 교회의 지도자와 신학자, 선교사와 신자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어야 한다.

8. 결론: 부흥 이후에도 끝까지 지켜야 할 것

역사 속의 부흥운동은 놀라운 은혜의 증언과 인간의 심각한 실패를 함께 남겼다. 그 실패는 부흥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교회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살피며 말씀의 진리와 거룩함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경고다.

우리는 부흥을 사모하면서도 교리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과 겸손을 잃어서도 안 된다. 회심의 열매를 기뻐하되 그 열매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으로 이어지도록 돌보아야 하며, 지도자의 성공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부흥 이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부흥 이후에도 우리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사람의 명성을 남기는 부흥이 아니라, 교회가 끝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부흥이다.

주요 참고문헌

  1. Dictionary of Welsh Biography, “Howell Harris (1714–1773)”; A Dictionary of Methodism in Britain and Ireland, “Griffith, Sidney”. 해리스와 그리피스의 관계, 1750년 분열 및 이후의 화해. ↩︎

  2. Douglas L. Winiarski, “Shakers and Jerkers: Letters from the ‘Long Walk,’ 1805, Part I” (2017). 케인리지 이후의 신체적 현상과 셰이커 운동의 확산. ↩︎

  3. Gastón Espinosa, William J. Seymour and the Origins of Global Pentecostalism (Duke University Press, 2014); PBS, “Azusa Street”. 아주사 부흥의 인종적·교리적 갈등 및 지도권 분열. ↩︎

  4. Biblioteca Nacional de Chile, “Fundación de la Iglesia Metodista Pentecostal en Chile (1909)”; Luis A. Orellana Urtubia, “La matriz religiosa del pentecostalismo en Chile” (2016). 칠레 부흥과 1932년 교회 분열. ↩︎

  5. Kevin Ward, “Tukutendereza Yesu: The Balokole Revival in Uganda”, Dictionary of African Christian Biography. 동아프리카 부흥의 내부 갈등과 생활규율 문제. ↩︎

  6. Dartmouth Libraries, “George Whitefield — Early Supporter”; Church History, “Auditing Revival: George Whitefield and Public Accounting in Colonial America”. 휘필드의 베데스다 고아원 운영과 노예제 연루. ↩︎

  7. Yale & Slavery Research Project, “Jonathan Edwards”; Princeton & Slavery, “Samuel Hopkins and the Paradoxical Legacy of Jonathan Edwards Sr.”. 에드워즈의 노예 소유와 후계자들의 노예제 폐지 운동. ↩︎

  8. “A Reformed Confessional Perspective on Racial Apartheid in the History, Theology, and Practice in the South African Dutch Reformed Church” (2021). 1857년 인종별 성찬 분리 결정과 이후의 교회 조직 변화. ↩︎

  9.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Part III (1746). 참된 은혜로운 감정과 지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천에 관한 신학적 분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