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12 · 신학 소논문

참된 영적 회심의 표지

중생과 믿음의 실재, 성화의 열매, 구원 확신

참된 회심의 본질과 증거를 구별하고 요한일서와 개혁주의 회심론을 대조합니다.

성경 주해 · 개혁주의 부흥신학 · 출처 미주 3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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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어떤 질문에 답해야 하는가: 부흥의 진위와 개인의 회심은 다르다

교회가 부흥을 말할 때에는 서로 구별해야 하는 질문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어떤 집단적 운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가 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운동에 참여한 한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첫째 질문에서는 선포된 교리의 내용과 공동체 전체의 방향, 오랜 기간 나타난 열매를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그 모임에 참여한 모든 개인의 중생을 확정할 수는 없다. 반대로 한 사람이 진정으로 회심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참여한 집회의 모든 주장이나 방법이 올바르다는 뜻은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 표지』는 본래 특정한 종교적 운동이 성령께로부터 비롯된 역사인지 평가하기 위한 저작이다. 그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죄에 대한 반대, 성경의 권위, 진리, 사랑의 표지를 개개인의 구원을 판정하는 무오한 시험지로 곧바로 바꾸면 원래의 논증 대상을 혼동하게 된다.1

그렇다면 개인의 참된 회심은 무엇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곧 두 가지 상반된 위험에 부딪힌다.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일정한 종교적 행동만으로 구원을 확증한다면 거짓 확신을 줄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신자에게 완전한 순종과 흔들림 없는 감정적 확신이 나타나야만 중생했다고 인정한다면 실제 신자를 불필요한 절망에 빠뜨릴 수 있다. 전자는 은혜를 값싼 선언으로 만들고, 후자는 은혜의 결과를 구원의 근거로 바꾸기 쉽다. 그러므로 ’참된 회심의 표지’를 다루려면 표지의 목록을 먼저 제시할 것이 아니라, 회심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 성령의 실제적인 적용, 믿음과 회개의 관계를 먼저 밝히는 것이 순서다.2

이 논문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참된 회심의 근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는 그 은혜에 대한 실제적인 인간의 반응이다. 참된 신앙에는 새로운 삶의 방향과 성화의 열매가 따르지만 그 열매는 사람마다 성숙의 정도가 다르며, 칭의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회심의 표지들은 자신을 구원하는 공로도 아니고 남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재단할 도구도 아니다. 그것들은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게 하고, 복음의 약속으로 다시 돌아가며, 교회가 인내심을 가지고 한 영혼을 돌보도록 돕는 제한된 증거다. 이 구별을 놓치면 참된 회심에 대한 관심 자체가 그리스도보다 자신에게 몰두하는 종교적 불안으로 변질될 수 있다.3

참된 회심의 ’표지’를 논하기에 앞서 그 단어의 논리적 위치를 정해야 한다. 신학적 의미에서 중생은 성령이 죄인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역사이며, 효력 있는 부르심은 그 죄인을 그리스도께 실제로 이끄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믿음과 회개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고 죄에서 돌이키는 구원의 응답이다. 반면 선한 행실과 형제 사랑, 지속적인 성화는 그렇게 시작된 생명이 역사와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결과이자 증거이다. 이러한 구분은 시간표상 수초의 선후를 측정하는 심리학적 모형이 아니라 구원의 원인, 응답, 결과를 구별하는 교리적 질서다. 칭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며, 그 선언의 근거는 회개 감정이나 변화한 품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다. 따라서 ’어떤 열매가 있는가’라는 진단 질문이 ’어떤 행위를 해야 의롭다 함을 얻는가’라는 구원의 조건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4

Ⅱ. 회심의 근원: 결단이 아니라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성경에서 회심은 단순한 종교적 결심이나 도덕적 개선과 동일하지 않다. 에스겔 36장 25–27절은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에서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며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고, 자기 영을 그들 안에 두어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문장의 주어는 계속 하나님이시다. 죄인이 먼저 새로운 본성을 만들어 내고 그 뒤에 하나님이 그 결과를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각과 사랑과 의지가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필요성을 가르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바람의 비유로 설명하신 것도 그 기원과 능력이 인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요 3:3–8). 이러한 본문에서 출발하면 참된 회심에 관한 질문은 ’사람이 어떤 체험을 만들어 냈는가’보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어떤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가’를 먼저 묻게 된다.5

제임스 뷰캐넌의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은 성령의 역사를 종교적 감동과 구별하면서 죄의 인식, 복음의 깨달음, 중생과 회심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성경적 사례를 통해 논의한다. 폴 워셔도 『회심』에서 회개의 요청과 믿음의 요청을 복음의 객관적 내용 안에 위치시키고, 후반부에서는 새 언약의 약속을 통해 마음의 변화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임을 강조한다. 워셔가 현대적인 ’죄인의 기도’를 비판하는 핵심 이유는 어떤 기도문을 드렸다는 사실이 곧 성령께서 중생을 일으키셨다는 보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판을 근거로 누군가가 기도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행위 자체를 잘못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기도문이라는 언어 형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 과거의 발화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는 데 있다.6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순서가 존재한다.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그는 말씀으로 선포된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회개하게 된다. 하지만 이 순서를 시간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심리적 단계표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회심자가 자신 안에서 중생이 일어난 순간을 신체 감각으로 식별할 필요는 없다. 성령이 신자를 그리스도께 이끄시는 역사와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행동은 실제 구원의 사건 속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날짜, 어느 집회에서 이런 감정을 경험했다’는 기억이 중요한 간증의 소재가 될 수는 있지만 중생의 최종 근거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믿음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정리한 회심 연표보다 앞서며, 그 은혜의 참됨은 그리스도와 말씀을 향한 실제적인 관계 안에서 살펴야 한다.7

이 논문의 주요 성경 근거인 요한일서를 먼저 그 자체의 문제의식에서 읽어야 한다. 요한일서는 사도적 증언이 전하는 생명의 말씀과 하나님과의 사귐(1:1–4)을 서두에 놓는다. 이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선언(1:5) 아래, ’죄가 없다’는 주장과 실제로 죄를 자백하는 신앙을 구별한다(1:8–2:2). 따라서 뒤이어 나오는 순종과 사랑에 관한 진술을 읽을 때, 요한이 이미 신자에게도 죄의 고백과 그리스도의 대언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서신은 자신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확신을 주는 책도 아니고, 죄와 싸우는 그리스도인이 한번 넘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절망하도록 쓰인 책도 아니다. 저자는 공동체를 흔드는 잘못된 신앙고백과 사랑의 결핍을 경계하면서, 신자들이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도록 기록한다고 밝힌다(5:13). 이 목적을 함께 고려해야 분별의 준엄함과 구원의 확신이 서로 맞서지 않는다.8

Ⅲ. 참된 회심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성경적 방향

첫 번째이자 중심적인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말하면서 그 출생을 인간의 혈통이나 의지에 환원하지 않는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거나 종교적 공동체에 등록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하나님이 제시하신 그대로 받아들이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소망을 오직 그분에게 의탁하는 일이다. 워셔가 구원자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명령을 완전하게 수행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원의 중심에서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통치와 은혜를 의지하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믿음이 참되다는 사실은 믿음 자체의 강도보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와 결부되어야 한다.9

두 번째 방향은 죄에 대한 새로운 판단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다. 회개는 단순한 심리적 후회나 불행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11절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을 구별한다. 세상적인 후회는 자신의 평판이 무너졌거나 예상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는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를 미워하며, 그분께 돌아가기를 원한다. 존 에인절 제임스가 구원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독자들을 향해 강조하는 것도 단지 더 많이 울거나 오래 괴로워하라는 요청이 아니다. 그는 죄의 각성에 머물러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는 위험을 지적한다. 슬픔의 눈물은 회개에 수반될 수 있지만, 눈물의 양이 회개의 진실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다.10

회개를 설명할 때에도 두 가지 혼동을 피해야 한다. 첫째, 죄에 대한 충분한 슬픔을 쌓아야 비로소 그리스도께 나아갈 자격을 얻는다는 생각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근거를 완성하신 분이지, 이미 충분히 변화된 사람에게 나중에 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둘째, 믿는다고 말하면서 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죄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생명의 은혜가 실제로 임한 사람은 불완전하더라도 죄를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 시작한다. 세즈윅은 은밀한 죄와 고의적인 죄를 구별하면서, 죄가 신자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과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하는 상태를 구별한다. 이 구별은 회개를 완전주의로 바꾸지 않으면서도 의도적인 죄의 정당화를 거절할 수 있게 한다.11

이제 회심을 이루는 믿음과 회개를, 회심의 실재를 드러내는 삶의 열매와 구별해야 한다. 첫째와 둘째로 설명한 것은 죄인이 복음 앞에서 실제로 그리스도께 의탁하고 죄를 버려 하나님께 돌아서는 복음적 응답이다. 반면 다음에 살필 말씀에 대한 태도, 형제 사랑과 순종은 그러한 생명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의 영역에 속한다. 특히 ’말씀을 향한 태도’는 믿음과 전혀 분리된 추가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진리 앞에 나타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다. 이 구분을 무시하면 열매가 없는 거짓 고백을 제대로 문제 삼을 수도 없고, 더 심각하게는 열매의 수준을 칭의에 필요한 선행 조건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12

세 번째 방향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관계다. 참된 회심자는 성경에 관한 모든 난제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판단과 종교적 감정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신뢰하고 그 앞에서 배우며 교정받고자 한다. 요한일서 2장 3–6절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고백과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구절은 율법을 완벽히 지켜야 비로소 구원받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관계가 실제 생활과 단절된 공허한 지식일 수 없다는 경고다. 어떤 사람은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면서도 자신의 거짓과 탐욕을 정당화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새로 배우는 중이라 정확한 용어가 서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지식의 분량이 아니라 계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진실한 태도와 그 지식이 삶에 작용하는 방향을 살펴야 한다.13

요한일서 2장 3–6절의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는 논증은 2장 1–2절의 그리스도의 대언과 속죄를 전제로 이어진다. 요한이 문제 삼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기모순이다. ’안다’는 말은 추상적 정보의 소유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실수 없는 순종을 요구하는 완전주의적 구원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실제로 사귀는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가볍게 여기거나 거짓말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논증이다. 같은 서신이 신자의 죄 고백과 그리스도의 대언을 이미 인정한다는 사실은, ’계명을 지킨다’는 말을 일회적 실수 없는 행동의 총량으로 환원할 수 없도록 한다.14

네 번째 방향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요한일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생명에 속하였다는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친다(요일 3:14). 그러나 여기에서 사랑을 잠시의 따뜻한 감정이나 갈등 없는 인간관계로 축소하면 본문의 의미를 놓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이전처럼 자신만을 사랑하는 태도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때로는 이웃의 필요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죄를 범했다면 사과하며, 진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교만과 멸시를 멀리하는 방향으로 자라게 된다. 참된 사랑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명하신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함께 포함된다. 에드워즈의 성령 분별론에서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요한 표지로 제시되지만, 그것은 집단적 영적 운동의 평가라는 원래의 용도를 보존한 채 요한일서 자체의 개인적 권면과 구별하여 적용해야 한다.15

요한일서 3장 14–18절은 사랑을 내면의 호감과 구별한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을 안다고 하면서, 16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버리신 사건을 사랑의 척도로 제시한다. 이어 17절은 실제 생활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 궁핍한 형제를 보고도 마음을 닫는 문제를 묻고, 18절은 사랑을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권한다. 문맥상 사랑은 사회적 인기도나 다정한 성격이 아니라 십자가에 근거한 실질적인 자기 내어줌이다. 또한 4장 7–21절에서 사랑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먼저 자기 아들을 보내신 일에 놓인다(4:9–10, 19). 그러므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께 합격한다’는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을 받은 자에게 사랑이 나타난다’는 구조를 따라야 한다. 이때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고백과 떨어져 있는 독립적 덕목이 아니다(4:1–3).16

다섯 번째 방향은 불완전함 속에서도 지속되는 순종과 인내다. 예수께서는 나무를 열매로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좋은 말이나 놀라운 능력의 주장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판정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마 7:15–23). 야고보서 2장은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관계를,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을 대조한다. 그러나 성화의 열매가 칭의의 공로가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롭다 하시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이며, 참된 믿음에 뒤따르는 선한 행실은 그 믿음의 실재를 드러내는 결과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은 선행을 살아 있는 참 신앙의 열매와 증거로 설명하지만, 선행이 죄 사함이나 영생을 얻을 공로가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매를 살피라는 명령은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신다는 복음과 대립하지 않는다.17

요한일서 3장 6절과 9절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강한 표현은 앞서 읽은 1장 8절과 2장 1절, 곧 신자가 죄를 부인해서는 안 되며 죄를 범했을 때 그리스도라는 대언자가 있다는 말씀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 이 긴장을 무시하여 ’참된 신자는 어느 날부터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면 요한의 첫 권면과 충돌한다. 반대로 이 구절들을 무의미한 과장으로 돌리면 요한이 강하게 거부한 죄의 지속적 지배와 불법의 문제를 약화한다. 핵심은 죄와 싸우며 자백하는 삶과 죄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삶이 다르다는 데 있다. 그러나 특정한 횟수나 기간을 기준으로 누군가의 중생 여부를 판정하는 기계적인 지표를 요한일서에서 추출할 수는 없다. 이 서신의 경고는 신자를 자기 의로 떠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생명이 죄와 화해할 수 없음을 알려 그리스도의 은혜에 더 진실하게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다.18

이 다섯 방향은 서로 다른 다섯 등급의 그리스도인들을 나누는 시험표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회개, 말씀에 대한 사랑과 순종,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인내는 한 생명이 밖으로 나타나는 서로 연결된 면들이다. 어떤 면은 시기마다 더 분명하게 보이고 어떤 면은 연약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는 죄와 싸우는 고통이 크게 드러나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웃을 돌보는 지속적인 사랑이 두드러질 수 있다. 또 한 신자도 오랜 침체를 겪으며 이러한 열매를 거의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각 표지의 감정적 강도를 합산하여 일정 점수에 도달하면 구원을 확정하는 식의 방식은 성경적이지 않다. 참된 회심의 표지를 살피는 일은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방향을 보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일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중생의 최종 판결을 인간의 기술로 대체하는 일이 아니다.19

Ⅳ. 거짓 확신을 경계하면서도 연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

참된 회심에 관한 연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다. 한쪽은 오래전에 했던 신앙 결단을 구원의 완전한 보증으로 삼으면서 현재의 불신앙과 지속적인 죄를 전혀 문제 삼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한쪽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죄를 미워하지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신이 전혀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믿음의 열매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첫째 사람에게는 말뿐인 신앙고백과 구원의 은혜를 구별해 주어야 하고, 둘째 사람에게는 작은 믿음으로도 완전하신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는 복음의 약속을 제시해야 한다. 모든 불안을 거짓 회심의 표지라고 단정하는 목회는 믿음이 약한 신자를 상하게 하며, 모든 불안을 즉시 없애 주려는 성급한 위로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거짓 평안을 줄 수 있다.20

고린도후서 7장 10–11절도 같은 신중함으로 다루어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먼저 복음 전도집회에 모인 불신자들의 최초 회심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사도의 책망을 듣고 슬퍼하며 태도를 바꾼 일을 설명한다(7:8–1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의 구별은 회개의 성격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유익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그 회개와 오늘 어떤 개인의 최초 회심을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죄를 마주한 슬픔이 자기연민이나 평판의 두려움만으로 끝나지 않고 악에서 돌이키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구절을 회개할 때 반드시 관찰되어야 하는 특정한 감정의 강도나 행동의 수를 정하는 공식으로 삼을 근거는 없다.2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이 두 극단을 피할 신학적 구별을 제공한다. 참된 믿음은 구원받을 확신과 관계되지만, 확신의 정도와 자각은 모든 신자에게 언제나 똑같이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 신자도 오랫동안 확신을 기다리거나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확신이 약해질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참된 믿음 없이도 자신을 안전하다고 오해할 수 있다. 따라서 확신의 근거를 살필 때 하나님의 약속, 은혜의 진실한 증거, 성령의 증언을 함께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세 요소의 관계를 뒤집어 자신의 내면에서 충분한 변화가 발견될 때에야 그리스도의 약속이 믿을 만하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감정과 성화 수준에 따라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의 자기성찰은 언제나 그 약속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22

요한일서 5장 13절은 이 서신의 목적을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본문의 엄중한 경고를 읽은 독자에게 남아야 할 결론은 구원의 확신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비관주의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 2항이 언급하는 확신의 근거는 구원의 약속의 신적 진실성, 그 약속과 관련된 은혜의 내적 증거, 양자의 영이 주시는 증언이다. 이 셋은 내면의 느낌이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회심의 열매는 성경이 선포한 은혜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열매가 구원의 역사적 근거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목회자가 영혼을 돌볼 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대상을 먼저 설명하고, 그 믿음의 진실성을 묻는 가운데 열매를 신중하게 살피고, 확신이 약한 사람에게는 다시 복음의 객관적 약속을 제시하는 순서를 지켜야 한다.23

조엘 비키의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이 유익한 이유는 영적 침체를 겪는 사람에게 더 강한 결심만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다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칭의의 여러 측면과 의식 속에서 경험하는 칭의를 설명할 때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죄인이 실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실과, 이미 받은 칭의를 마음속에서 새롭게 확신하게 되는 경험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다. 영적 침체에서 회복된 사람이 다시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죄 사함의 기쁨을 느꼈다고 해서 그때 새로운 칭의를 반복해서 받은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4–5항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칭의를 작정하셨더라도 그리스도를 실제 적용하시기 전에 개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아니며, 칭의된 신자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부성적 불쾌하심을 경험하더라도 칭의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는다고 구별한다.24

세즈윅의 ‘죄의 잔존’과 ’죄의 지배’ 사이의 구별도 같은 목회적 문제에 도움을 준다. 참된 신자는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며, 심각한 유혹이나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죄를 계획하고 지속적으로 정당화하며 하나님께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태도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목회자는 한 번의 실패만을 보고 최종 심판을 선언하는 일을 피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삶을 정상적인 신앙이라고 승인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밝히 제시하고, 은혜를 죄의 면허로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죄의 심각성을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25

구원에 대한 자기점검이 신자에게 도움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돌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자신이 충분히 뜨겁게 기도했는지, 충분히 깊이 울었는지, 충분한 사랑을 느꼈는지라는 질문을 끝없이 반복하는 일은 때로 더 큰 절망만 낳는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내쫓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요 6:37). 이 약속은 구원을 이미 확신하는 사람만을 위한 선언이 아니다. 죄책으로 괴로워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려는 사람이 붙잡아야 할 복음의 말씀이다. 제임스가 각성한 죄인을 계속해서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권한 것도, 자신의 영적 상태를 완벽히 판정한 뒤에야 믿음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된 회심의 표지를 살핀 뒤 독자에게 남아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은 ’나의 표지’가 아니라 ’나의 구주’이시다.26

Ⅴ. 교회의 분별과 구원 선언의 한계

교회가 개인의 회심을 이야기할 때에는 목회적 판단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지식을 구별해야 한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 회원권과 권징의 문제에서 신앙고백의 내용과 삶의 증거를 살피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이 교회 지도자가 사람의 마음을 완전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고 가르친다(삼상 16:7; 고전 4:5). 따라서 교회는 무분별한 구원 선언을 피해야 하지만, 동시에 전지하신 하나님의 자리에서 특정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려는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목회적 분별의 결과는 언제나 말씀의 권위에 묶여 있고, 더 나은 증거와 회개가 나타날 때 신중하게 다시 살필 수 있어야 한다.27

회심을 평가하는 실제적인 방법도 이러한 한계를 반영해야 한다. 단 한 번의 간증이나 등록 신청서로 전부를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이 누구를 구원자로 믿는지, 죄에 관하여 무엇을 고백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배우는지, 공동체 가운데 어떤 삶의 방향을 보이는지 인내심 있게 확인해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관찰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조건 목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믿음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성도의 생활에는 가정환경과 사회적 어려움, 지식과 경험의 차이가 작용한다. 교회는 악한 행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외적인 표현과 내적인 경건이 항상 같은 속도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한 양을 돌보시는 목자이시라는 사실이 분별의 엄격함을 없애지 않지만 그 엄격함이 잔혹함이 되는 것도 막아 준다.28

이러한 이유로 개인의 회심에 관한 글은 부흥의 성공 여부를 판정하기 위한 통계표가 될 수 없다. 집회에서 많은 사람이 결단하고 기도했다는 사실은 목회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사건일 수 있지만, 그 수치를 곧 구원받은 사람의 확정 숫자로 기록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후에 낙심하거나 교회를 떠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당시의 모든 회심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성경이 인간에게 허락한 범위를 넘어서는 확실성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참된 회심의 은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새로운 삶을 낳는다는 진리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의 구원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며, 교회의 역할은 그분의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각 영혼을 성실하게 돌보는 데 있다.29

이 논증의 범위 안에서 ’표지’는 법정의 판결문과 다르다. 교회는 교리와 생활을 살필 실제적인 책임이 있지만, 타인의 마음을 전지적으로 읽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 표지도 언급하지 않으면 사도가 기록한 사랑과 순종에 대한 권면을 지우는 셈이다. 성경이 허락한 길은 양 극단 사이에 있다. 신자의 신앙고백이 참된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죄를 정당화하지 않고 돌이키는지, 이웃 사랑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지 살피되, 연약한 지체가 큰 죄책과 고난 속에 있을 때에는 이를 단순한 ’검사 실패’로 낙인찍지 않는 것이다. 목회적 분별의 정확성은 기준의 엄격함만이 아니라 그 기준을 적용하는 복음적 온유함에도 달려 있다.30

Ⅵ. 결론: 표지의 목적은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참된 영적 회심의 표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삶의 방향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믿고 의지하며, 죄를 하나님 앞에서 악으로 인정하고 돌아서며, 성경의 말씀을 존중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넘어짐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고자 하는 인내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들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다섯 문턱도 아니고, 죄인 스스로 쌓아야 하는 다섯 공로도 아니다. 참된 회심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며, 그 회심의 구속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복음에 있다. 열매는 뿌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생겨난 생명이 열매를 낳는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 확신을 경계하면서도 연약한 믿음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개인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일에 몰두하기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분께 나아오도록 권해야 한다. 회심의 참됨을 묻는 질문은 결국 우리를 자신에게서 벗어나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한다.31

미주


  1.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 표지』(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Section I–III, 특히 Section II의 다섯 가지 적극적 분별 기준. 이 저작의 직접적인 질문은 성령의 공적 역사에 대한 판정이며 개개인의 중생 여부에 대한 무오한 식별표가 아니다. 요일 4:1–7과 본문 전체의 적용 범위를 구별한다.↩︎

  2. 마 7:21–23; 요 6:37; 엡 2:8–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장(칭의), 16장(선행), 18장(은혜와 구원의 확신).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WCF.↩︎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효력 있는 부르심), 14장(구원하는 믿음), 15장(생명에 이르는 회개), 18장(확신); 빌 1:6. ’표지’의 인식론적 한계에 관한 설명은 이러한 출처를 종합한 필자의 신학적 판단이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효력 있는 부르심), 제11장(칭의), 제14장(구원하는 믿음), 제15장(생명에 이르는 회개), 제16장(선행);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6–87문, https://opc.org/sc.html . 원인·응답·결과의 구별은 이 교리 진술에 기초한다.↩︎

  5. 겔 36:25–27; 요 3:3–8; 엡 2:1–10; 딛 3:3–7. 중생과 회심의 신적 기원에 관한 중심 성경 본문.↩︎

  6. 제임스 뷰캐넌,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The Office and Work of the Holy Spirit), 성령의 회심 사역 및 성경적 회심 사례에 관한 제1·2부; 폴 워셔, 『회심: 복음의 부름에 대한 참된 반응』(The Gospel Call and True Conversion), 제3장(죄인의 기도와 로마서 10장 해석), 한국어판 인쇄 약 60–61쪽; 제9–10장(새 마음과 성령의 내주).↩︎

  7. 요 1:12–13; 3:3–8; 롬 10:9–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1–2항, 14장 1항. 심리적 회심 시점의 기억과 실제 중생의 구별은 본문에 근거한 목회적 적용이다.↩︎

  8. 요일 1:1–2:2, 2:18–27, 4:1–3, 5:13. 서신의 저술 목적을 고려한 본문 내적 비교이며, 특별한 영적 운동의 집단적 진위 문제와 분리한다.↩︎

  9. 요 1:12–13; 요 6:35–40; 롬 3:21–26; 폴 워셔, 『회심』, 제2장 「믿으라」, 제4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한국어판 인쇄 약 47–48, 76–77쪽. 그리스도의 세 직분 전체를 존중하되 완전한 순종을 구원의 선행 조건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10. 고후 7:9–11; 눅 18:9–14; 행 16:30–34; 존 에인절 제임스,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The Anxious Inquirer after Salvation, Directed and Encouraged), 제4장 「회개」, 제5장 「믿음」, 제6장(오해들), 특히 한국어판 PDF 115–116면 및 148–149면. 영문 목차 확인: Grace Gems 원전.↩︎

  11. 오바댜 세즈윅,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밀한 죄와 거룩』, 시 19:12–14 강해 중 제1·3·4장. 원저 The Anatomy of Secret Sins, Presumptuous Sins, Sins in Dominion, & Uprightness (1660); 롬 6:12–14. 죄의 잔존, 유혹, 일시적 굴복, 지배 사이의 세부 구분을 유지한다.↩︎

  12. 요 1:12–13; 행 20:21; 엡 2:8–10;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6–87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 2항. 믿음과 회개의 복음적 응답 및 삶의 열매를 구별한다.↩︎

  13. 요일 2:3–6, 3:1–3, 5:1–5; 딤후 3:15–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 2항. 말씀과 행동의 관계를 완전주의로 해석하지 않는다.↩︎

  14. 요일 1:8–2:6. 저자는 죄의 고백과 그리스도의 대언을 먼저 가르친 뒤 계명을 지키는 삶을 ’하나님을 앎’의 증거로 제시한다.↩︎

  15. 요일 3:14–18, 4:7–21; 갈 5:22–23; 에드워즈,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 표지』, Section II 제5표지. 집단적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주장과 요한일서의 개인적 신앙 권면은 서로 구별한다.↩︎

  16. 요일 3:14–18; 4:1–3, 7–2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사랑에 대한 문맥적 주해. 사랑을 칭의의 독립적 근거나 인간의 본성적 따뜻함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17. 마 7:15–23; 약 2:14–26; 갈 5:16–26; 엡 2:8–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장 1항, 16장 2–5항. 선행은 의롭다 하심의 공로가 아니라 참된 믿음의 열매다.↩︎

  18. 요일 1:8–2:2, 3:4–10, 5:13; 갈 5:16–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3장 2항, 제17장 3항. 죄의 잔존과 새로운 생명의 방향을 함께 고려하여 완전주의적 또는 방임적 독해를 피한다.↩︎

  19. 롬 7:15–25(주해 전통상 해석 차이 유의), 갈 5:16–17; 빌 1:6, 3:12–14. 성화의 점진성과 개인차에 관한 신학적 종합.↩︎

  20. 존 에인절 제임스,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7–10장, 특히 제8장 연약한 믿음의 낙심에 관한 설명(한국어판 PDF 211–212면); 폴 워셔, 『회심』, 제3장, 한국어판 약 60–61쪽. 두 저자의 목회적 강조를 동일시하지 않고 서로 다른 위험에 대조했다.↩︎

  21. 고후 7:8–12. 고린도 교회에 보낸 책망에 대한 반응이라는 문맥과 구원론적 회개에 대한 일반적 적용은 구별해야 한다.↩︎

  2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장 1–4항; 요일 5:13; 히 6:17–19; 롬 8:15–16. 믿음의 실재와 확신의 자각을 구분하되 구원 확신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23. 요일 5:1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 1–4항, 공식 원문 https://www.opc.org/wcf.html ; 존 에인절 제임스,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8–10장. 약속·내적 증거·성령의 증언을 신앙고백의 순서에 따라 설명한다.↩︎

  24. 조엘 비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Backsliding: Disease and Cure), 제7장(칭의의 여러 측면, 양심의 법정에서의 경험; 한국어판 PDF 약 120–124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장 4–5항, 18장. 비키의 서술 중 ’영원 전의 칭의’는 신자의 실제 칭의 시점을 앞당기는 교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25. 세즈윅,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밀한 죄와 거룩』, 제4장(죄의 지배), 제5장(정직한 마음); 롬 6:14; 요일 1:8–9. 심각한 죄와의 싸움과 죄의 지속적 승인 사이를 구분한다.↩︎

  26. 요 6:37–40; 마 11:28–30; 존 에인절 제임스,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5–7장. 독자의 믿음 대상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다.↩︎

  27. 삼상 16:7; 고전 4: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30장(교회와 권징), 18장(확신). 교회의 목회적 판단과 하나님의 최종 판결을 구별한다.↩︎

  28. 마 12:20; 사 40:11; 존 에인절 제임스,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8장(연약한 신자의 위로); 조엘 비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 제1·2부의 회복 논증.↩︎

  29. 요일 2:19; 고전 4:5; 롬 8:29–39; 마 7:15–23. 역사적 집회 참가자의 구원 숫자를 직접 확정할 수 없다는 판단은 성경 원리의 목회적·방법론적 적용이다.↩︎

  30. 삼상 16:7; 고전 4:5; 요 6:37; 마 12:20. 교회의 판단과 하나님의 최종적 판단을 구별하면서 연약한 믿음을 돕는 목회적 적용.↩︎

  31. 겔 36:25–27; 요 6:37–40; 엡 2:8–10; 빌 1:6; 존 오웬, 『그리스도의 영광』(Meditations and Discourses on the Glory of Christ),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묵상의 목표에 관한 논의. 결론은 본 논문의 통합적 신학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