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11 · 신학 소논문

부흥은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해지는가?

특별한 은혜의 기억과 다음 세대의 신앙 전수

부흥의 기억과 복음 교육, 언약 공동체와 중생의 관계를 성경과 역사로 검토합니다.

성경 주해 · 개혁주의 부흥신학 · 출처 미주 2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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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부흥을 경험한 세대의 역설

어떤 세대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다음 세대의 신앙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부모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직접 겪지 않은 자녀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단지 오래된 간증이나 존경받는 신앙 지도자의 전기로 들릴 수 있다. 경험의 강도가 세대를 넘어 그대로 이전되지는 않으며, 한 세대가 고백했던 믿음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흥의 역사를 사랑하는 교회는 ’그때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은혜를 증언받은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부흥을 기념하는 행위와 하나님을 아는 믿음을 가르치는 행위가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

성경은 이 문제를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한다. 여호수아서 끝부분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아는 세대가 주를 섬겼다고 전한다(수 24:31). 사사기 2장 10절은 이어서 여호와와 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고 서술한다. 이 두 본문을 곧바로 모든 부흥운동의 필연적인 쇠퇴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다. 여호수아가 활동한 시대의 언약적·역사적 상황을 먼저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세대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다는 사실과 다음 세대가 그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섬긴다는 사실 사이에는 자동적인 연결이 없다는 경고는 분명하다. 기억의 단절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그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2

부흥에 관한 역사 기록을 즐겨 읽는 독자들은 때로 이 경고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어떤 부흥이 일어난 후 수십 년이 지나 교회가 침체되었다는 기록을 보고, 부모 세대가 신앙교육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지역 교회의 쇠퇴에는 인구 이동, 정치적 압력, 이주와 경제적 변화, 지도자의 죽음, 교리적 논쟁, 공교육과 가정생활의 변화 등 여러 조건이 관여할 수 있다. 역사적 원인을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세대 간 신앙 전수 실패라는 도덕적 교훈을 먼저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신학적으로 확실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부모의 과거 경험 자체를 자녀의 믿음으로 인정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동시에 부모와 교회가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책임을 포기하도록 허용하지도 않으신다.3

특별히 사사기 2장 10–12절을 살피면 ’알지 못했다’는 표현을 단순한 역사 지식의 결핍으로 축소할 수 없다. 2장 7절은 앞선 세대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 일을 보았다고 말하고, 10절은 새로운 세대가 그분과 그분의 행사를 알지 못했다고 한 다음, 11–12절에서 바알을 섬기고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버렸다고 서술한다. 문맥상 문제는 과거 사건의 연도를 암기하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고, 출애굽의 하나님을 언약의 주로 경외하고 순종하지 않는 데 있다. 따라서 ’역사를 많이 가르치면 우상숭배가 사라진다’는 단순한 교육결정론도 이 본문에서 도출할 수 없다. 기억의 실패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예배의 실패라는 더 깊은 문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다음 세대의 교육에서 정보 전달뿐 아니라 참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삶의 방향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다.4

Ⅱ. 유산은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신명기 6장 4–9절의 명령은 세대 간 신앙 전수의 근본적인 방향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선언은 부모와 자녀가 먼저 여호와가 누구이신지 듣도록 요청한다. 이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그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명령이 연결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과 말씀을 가르치는 행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본문을 사용하여 부모가 일정한 교육 절차를 수행하면 자녀의 중생이 보장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을 선포하지, 인간이 중생을 일으키는 기술을 제공하지 않는다. 참된 교육은 자녀를 부모의 영적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 아니라, 부모 자신도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녀를 세우는 일이다.5

신명기 6장의 명령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형성할 삶을 내다보는 문맥에서 주어진다. 6장 4절의 쉐마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유일하심과 언약적 충성을 요구하며, 5절은 온 마음과 생명과 힘으로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한다. 이어 6–9절은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집 안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일어날 때나 자리에 누울 때 자녀에게 반복해 가르치라고 한다. 그런데 6장 20–25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녀가 ’이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고 물을 때 부모가 ’우리가 바로의 종이었으나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구원 역사로 답하도록 명한다. 이 대답에서 율법의 명령은 출애굽의 은혜와 분리된 자기계발의 윤리 규정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신약 교회는 출애굽 사건을 자신의 구속사적 맥락 안에서 읽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성취를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민족적·땅에 관한 약속을 오늘의 개별 가정에 무차별적으로 이전할 수는 없다.6

시편 78편 1–8절은 한 세대가 그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내용을 더욱 명료하게 제시한다. 시편 기자는 조상들이 전한 것과 여호와의 영예, 능력,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후대에 숨기지 않고 알리겠다고 다짐한다. 목적은 다음 세대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행사를 잊지 않으며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증언,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 언약적 순종이 함께 들어 있다. 부흥의 역사를 기록하고 읽는 일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소중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증언이 성경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어느 지역에서 보고된 회심의 숫자나 기이한 현상은 성경의 권위를 갖지 않으며, 역사적 기억은 언제나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의해 해석받아야 한다. 부흥 이야기가 다음 세대에게 유익하려면 ’우리 선배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그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었으며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겼는가’라는 질문으로 독자를 인도해야 한다.7

시편 78편도 1–8절에서 교육의 목적을 밝힌 뒤 9절 이후 긴 역사 회고를 통해 백성의 반복적인 불순종을 드러낸다. 시편은 조상들의 위대한 종교적 업적을 미화한 기록이 아니다. 기억할 사건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기이한 구원과 돌보심인 동시에, 그 은혜를 받고도 완악해졌던 백성의 실패다. 그 결과 시편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목자 같은 인도가 부각된다(78:65–72). 이는 세대 전수가 한 공동체의 성공 경험을 자랑스럽게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불신실함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성경의 계시 자체가 자신들의 조상을 비판적으로 기억하도록 한다면, 후대 교회도 자신이 사랑하는 부흥운동의 흠과 과장을 가린 채 영웅담만 전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8

여기에서 간증과 교리교육을 경쟁시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실제로 행하신 일을 진실하게 증언하는 것은 성경을 읽는 자녀들에게 역사적 신앙의 생생함을 전할 수 있다. 반면 간증의 세부를 부풀리거나 모든 자녀가 부모와 같은 회심의 시간표, 눈물의 강도, 기도의 방식을 경험해야 한다고 압박하면, 신앙의 표준이 성경의 복음에서 특정 세대의 경험으로 옮겨간다. 교리문답은 감정 없는 문장을 암송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이루셨는지 같은 내용을 바르게 고백하도록 돕는 수단이다. 성경에 충실한 교리교육은 개인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경험을 객관적인 진리에 종속시킨다. 다음 세대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가문의 영적 영웅담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이다.9

이 논의를 교회사에서 실증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한 사례는 18세기 대각성 이후 설립된 뉴저지 대학(College of New Jersey, 후일 프린스턴 대학교)이다. 프린스턴 대학교 기록보관소에 따르면 뉴라이트(New Light) 성향의 장로교 목회자들과 지지자들은 1746년 대학 설립에 참여했고, 이후 복음 사역자들을 교육하려는 목적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이는 부흥의 한 흐름이 일회적 집회와 회심 증언을 넘어, 다음 사람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가르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사례에서 중요하게 읽어야 할 것은 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사건과 그 대학을 거친 사람들의 개인적 중생은 전혀 동일한 종류의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립 기록은 교육 기관의 목적과 형성을 입증하지만, 뒤따른 세대가 모두 참 신자였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대학이 1746년의 고백적 지향을 변경 없이 유지한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부흥의 교육적 유산은 기록과 제도로 남을 수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생명으로 자동 전이되지는 않는다.10

Ⅲ. 언약의 약속과 중생의 주권을 함께 붙잡기

다른 사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노샘프턴 목회다. 1730년대 각성의 기록은 에드워즈가 교회와 지역사회의 변화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가 1750년 노샘프턴 목회에서 물러난 사실을 ’부흥을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이 모두 배교했다’는 설명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에드워즈의 성찬 참여와 회원권 기준을 둘러싼 논쟁은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더드의 관행과의 차이, 지역의 교회 정치와 복합적 관계 문제를 포함했다. 예일대학 출판부가 편집한 에드워즈의 교회 관련 문서와 현대 연구는 그 갈등이 단순한 세대 간 신앙 퇴보의 지표보다 복잡함을 보여 준다. 이 사례는 앞의 뉴저지 대학과 다른 의미에서 유익하다. 부흥을 경험한 공동체에도 신학적·제도적 갈등은 남을 수 있으며, 그 결과를 단일한 도덕적 원인에 돌리기 전에 당대의 신앙고백과 회중의 실제 논쟁을 조사해야 한다. 교회가 자녀에게 부흥사를 가르칠 때에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직함 자체도 신앙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11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을 단순한 종교 선택의 자유방임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그와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창 17:7), 신약의 베드로도 오순절 설교에서 약속이 듣는 자들과 그 자녀들 및 하나님께서 부르실 먼 데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선포한다(행 2:38–39). 이 본문들을 개인별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지만, 자녀를 교회와 무관한 외부인처럼 여겨도 된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도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8장 4항은 믿는 부모의 자녀에게 세례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어지는 제5–6항은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중생한 것은 아니며 그 은혜의 적용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사역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 긴장 자체가 개혁주의 신앙교육의 출발점이다.12

사도행전 2장 39절의 약속은 이 점에서 특별히 문맥에 민감하게 읽어야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지적한 뒤 회개와 세례를 요청하고, 약속이 듣는 자들과 그 자녀, 먼 데 있는 모든 자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장의 마지막에는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라는 한정적 표현이 놓인다. 이는 약속을 혈통적으로 소유했다는 주장을 무조건적인 구원의 보증으로 해석하지 못하게 한다. 더구나 이 구절만으로 유아세례의 모든 논점을 완결했다고 주장하기보다, 창세기 17장과 신약의 언약적 연속성, 사도행전의 교회 형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28장의 교회론과 성례론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개혁주의가 자녀를 언약 공동체의 책임 안에서 가르치는 이유와, 그들의 실제 중생을 성령께 맡기는 이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13

세례는 신앙교육의 종착점도 아니고, 부모가 자기 자녀의 영적 상태에 대해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게 만드는 보증서도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언약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녀에게 복음의 내용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책임을 계속 가르쳐야 함을 상기시킨다. 가시적 교회의 지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믿음으로 사는 실재는 구별된다. 교회는 자녀가 오랜 시간 교회에 출석했거나 세례를 받았거나 교리문답을 정확히 답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내면적 중생을 무조건 확증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극적인 회심 간증을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린 신앙의 싹을 경멸하거나 자녀에게 비상한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성령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언제, 어떻게 믿음을 일으키시는지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역이며, 교회의 책임은 그 사역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을 꾸준히 제시하는 것이다.14

이 대목에서는 존 에인절 제임스와 폴 워셔의 목회적 강조가 서로 보완된다. 제임스는 구원을 걱정하지만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주저하는 사람에게 복음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제시한다. 그는 극적인 감정의 체험을 구원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공적 과정으로 만들지 말며, 그리스도를 지금 믿도록 이끈다. 워셔는 회심의 초자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종교적 결단이나 입술의 고백을 중생과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두 논증을 다음 세대 교육에 적용하면 하나의 균형이 생긴다. 자녀에게 복음을 진지하게 제시하되 결단의 행사나 기도문 낭송을 근거로 자동적인 구원 확신을 부여하지 않으며, 반대로 자녀가 강렬한 위기의식을 표현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지 못하도록 기다리게 하지도 않는다. 다만 두 책은 본래 어린이교육 전문서가 아니므로, 이 적용은 그들의 회심론을 가정과 교회의 교육 맥락에 종합한 신학적 추론이다.15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의 개인성도 여기에서 살아난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에서 난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일로 선포한다. 자녀는 부모의 회심을 자신의 회심으로 물려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의 교육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신 것도 아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15절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며 그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디모데의 신앙을 언급하는 바울의 말과 그의 어머니 유니게 및 외조모 로이스에 관한 언급(딤후 1:5)은 복음의 전수가 가정적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교육과 구원의 적용 사이의 최종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다.16

역사적 부흥을 교육 자료로 사용할 때에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자료를 분리해야 한다. 첫째는 당시의 편지·설교·회의록·일기 등 일차 증언이며, 둘째는 그것들을 모아 분석한 후대의 역사적 연구이고, 셋째는 그 사건을 통하여 후대 성도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를 논하는 신학적 해석이다. 세 종류는 모두 유익하지만 증거의 힘이 동일하지 않다. 예컨대 한 기록이 ’어느 해 어느 지역에서 특정한 모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건의 발생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나 그 기록이 곧바로 그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중생했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우리도 그때와 똑같은 모임을 열어야 한다’는 명령은 별도의 성경적 논증이 필요하다. 부흥사를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는 일은 과거의 특별한 은혜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사실과 해석과 규범의 경계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일이다.17

Ⅳ. 기억을 예배와 교육의 언어로 바꾸는 교회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먼저 교회가 무엇을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지난 세대의 집회가 얼마나 컸는지, 어떤 지도자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한 시대의 교회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만 전해 준다면 아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과거의 성공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죄를 깨달았던 이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용서의 유일한 근거인 이유, 성령께서 새 마음을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면, 역사적 증언은 복음 이해에 봉사하게 된다. 이것은 부흥사의 기록을 삭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부흥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역사 서술의 중심을 돌려드리자는 제안이다. 그 목적을 위해 교회는 각 시대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 역사적으로 정직하게 설명하는 일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사실과 미화가 뒤섞인 간증은 결국 증언받는 사람의 신뢰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18

뉴저지 대학의 사례가 보여 주듯 신앙교육은 기관과 교육과정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프린스턴 대학교 자체가 수행한 후대의 역사 연구는 설립기 인물과 제도에도 종교적 열망과 도덕적 모순이 공존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부흥 관련 교육의 목적이 영웅을 만들고 그들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라면, 다음 세대는 믿음을 배우는 대신 과거를 미화하는 습관을 배우게 된다. 부흥사를 정직하게 가르치는 교회라면 선배들의 용기와 성실함을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오류와 시대적 한계까지 성경의 판단 아래 둘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부흥의 역사를 냉소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이지 그 시대의 훌륭한 사람이나 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19

신앙 전수는 공적인 가르침과 가정의 생활을 함께 요구한다. 부모는 하루의 모든 순간을 설교로 채울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가정에서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태도, 자기 유익보다 진실을 택하는 선택,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 성경 말씀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는 실천은 아이들에게 신앙이 삶 전체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부모의 모범이 복음의 내용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삶의 모범만 있고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이 없다면, 자녀는 기독교를 단지 선량한 사람이 되는 윤리 교육으로 오해할 수 있다. 반대로 정확한 지식만 있고 그것을 믿는 어른들의 삶에서 전혀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가르침의 신뢰성은 상처받는다. 두 요소를 서로 대립시키지 말고 말씀이 삶을 판단하고 삶이 말씀의 진실성을 증언하도록 해야 한다.20

교회 역시 부모에게 모든 교육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에베소서 4장 11–16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직분자들을 주셔서 성도들을 세우고 공동체가 성숙하도록 하신다고 가르친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은 바울에게 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도 가르칠 수 있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명한다. 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복음의 내용이 임의로 바뀌지 않아야 함을 전제한다. 다음 세대 교육은 부모의 사적인 열심만이 아니라 교회의 공예배와 설교, 교리문답, 목양, 세대 간 교제의 공동 책임이다. 특히 성경을 제대로 읽을 기회가 적거나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회 교육의 가치는 부흥이 일어난 교회의 ’후속 프로그램’이라는 점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명하신 지속적인 사역이라는 점에 있다.21

교회의 역사적 증언을 교육에 사용할 때는 다음의 구별도 필요하다. 부모나 교사에게는 학생들의 이해와 지식과 반응을 점검할 책임이 있지만, 개인의 구원 여부를 최종적으로 꿰뚫어 볼 능력은 없다. 어떤 아이가 차분하고 말수가 적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없고, 다른 아이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이미 중생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은 말씀에 대한 믿음과 회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삶 가운데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의 성숙은 속도와 형태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교사는 과장된 확신을 요구하기보다 성경의 복음을 가르치고, 아이가 품은 질문을 경청하며,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자라기를 도와야 한다. 결단을 재촉해 발표된 숫자를 높이는 방식은 다음 세대의 신앙을 건강하게 세우는 길이 아니다.22

하나님의 주권은 부모와 교사의 수고를 무력화하는 명제가 아니라 겸손하게 만드는 진리다. 자신이 가르친 내용과 가정의 분위기가 아이의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부모는 쉽게 절망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일하신다는 약속도 함께 제시한다. 부모는 결과를 보장할 수 없어도 복음을 진실하게 가르칠 수 있고, 목회자는 모두의 미래를 알지 못해도 성경의 말씀을 충실히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자녀의 영적 상태를 지배하려는 마음을 버리되 자녀를 위한 사랑과 교육의 책임을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하면서도 그 열매를 자기 능력의 증거로 소유하지 않게 하는 자유를 준다.23

따라서 세대 간 전수에서 교회의 책임을 평가할 때도 두 가지 다른 질문을 사용해야 한다. ’부모와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성경의 복음을 바르게 가르쳤는가’는 말씀 앞에서 물어야 할 책임의 질문이다. 반면 ’그 아이들의 마음이 어느 시점에 중생했는가’는 하나님께 속한 심판과 은혜의 영역을 포함한다. 전자의 질문을 후자의 전지적 판정으로 바꾸면 교육은 인간의 통제 욕구가 되고, 후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책임은 무기력해진다. 부흥의 경험을 보존하기보다 복음의 진리를 맡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교회의 소명은 이 두 질문을 구별할 때 더 분명해진다.24

Ⅴ. 결론: 부흥의 기억보다 더 오래 전해져야 할 것

부흥의 경험은 다음 세대에 그대로 이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하여 선포되고 사랑받았던 성경의 복음은 다음 세대에도 동일한 진리로 전해질 수 있다. 부모 세대는 과거에 받은 특별한 감동을 자녀에게 재현해 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교회는 과거의 부흥을 기념하는 방식을 새로운 세대의 신앙 자체로 삼아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의 중생 사역을 가르치고, 예배와 성경교육과 가정의 삶에서 그 진리를 신실하게 증언해야 한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이 대단한 부흥의 목격자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성경에 따라 말해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참된 세대 전수의 목표는 ’우리의 시대를 재현하라’가 아니라 ’우리가 믿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도 알고 사랑하라’는 고백이어야 한다.25

미주


  1. 시 78:1–8; 신 6:4–9; 딤후 1:5, 3:14–15. 특별한 부흥 경험과 세대 간 신앙 전수를 구분하는 문제 설정은 이러한 성경 본문과 프로젝트 부흥론을 종합한 필자의 논증이다.↩︎

  2. 수 24:31; 삿 2:6–12. 사사기의 역사 서술을 모든 시대의 교회 쇠퇴에 관한 필연적 통계법칙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3.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Pentecost—Today?), 부흥의 열매와 후대 교회에 관한 평가; 존 H. 암스트롱, 『부흥을 준비하라!』, 제7장 「부흥: 그 시작과 전개, 그리고 쇠퇴」, 인쇄 127–148쪽. 역사적 원인을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는 자료의 증거 수준을 검토한 필자의 평가다.↩︎

  4. 삿 2:6–12와 수 24:31을 연결해 읽은 문맥적 해석. ’알지 못한다’가 곧 역사 연도에 대한 완전한 무지라는 단정을 피한다.↩︎

  5. 신 6:4–9; 11:18–21. 하나님 사랑과 자녀 교육의 연결은 본문의 명령이며, 특정 교육법이 중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요 3:3–8과 함께 읽은 신학적 구별이다.↩︎

  6. 신 6:4–9, 20–25; 11:18–21. 출애굽에 관한 자녀의 질문과 언약의 말씀 교육을 함께 읽되, 이스라엘의 구속사적 상황과 신약 교회의 적용 범위를 구별한다.↩︎

  7. 시 78:1–8; 145:4–7. 교회사적 증언과 정경적 권위의 구별은 딤후 3:15–17에 근거한 판단이다.↩︎

  8. 시 78:1–8, 9–72. 시편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반역도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21·88–90문; J. I.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참된 경외에 대한 논의; 마이클 리브스, 『선하신 하나님』(Delighting in the Trinity), 성삼위 하나님과 신적 사랑에 대한 논의. 두 저작은 핵심 15권의 신론적 참조 자료로 사용했다.↩︎

  10. Princeton University Archives, “Who Founded Princeton University?” (2016), https://universityarchives.princeton.edu/2016/01/who-founded-princeton-university/ ; Princeton University, “The Early Years,” https://princetoniana.princeton.edu/history/early-years . 대학 설립 연도, 설립자의 배경, 교육 목적은 대학 자체의 역사 기록에 근거한다. 기관 설립을 개인 중생의 증거로 삼지 않는 결론은 필자의 신학적 판단이다.↩︎

  11. Jonathan Edwards, An Humble Inquiry 및 교회 관련 문서 수록: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2, ed. David D. Hall (Yale University Press, 1994), https://yalebooks.yale.edu/book/9780300058970/the-works-of-jonathan-edwards-vol-12/ ; Douglas L. Winiarski, “New Perspectives on the Northampton Communion Controversy,” Jonathan Edwards Studies 3, no. 2 (2013), https://jestudies.yale.edu/index.php/journal/article/view/128 . 1750년 사임의 단일 원인론을 피한다. 본문의 1730년대 각성은 에드워즈의 『신실한 회심 이야기』(A Faithful Narrative)라는 별도의 역사적 증언과 연관된다.↩︎

  12. 창 17:7; 행 2:38–3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교회), 28장 4–6항(유아세례와 그 효력). 확인 가능한 원문: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특히 28장 5항은 세례받은 사람 모두가 반드시 중생했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13. 행 2:37–39; 창 17: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제28장 4–6항, https://www.opc.org/wcf.html . 이 글은 개혁주의 유아세례 이해를 전제하며, 행 2:39 단 한 절이 논쟁의 모든 쟁점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 1항, 25장 2–3항, 28장 4–6항; 요 3:3–8; 롬 10:14–17. 특정한 ’결단’의 기억을 신앙의 기초로 삼는 문제는 본문을 종합한 목회적 경계다.↩︎

  15. 존 에인절 제임스,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5–8장, 특히 제6장의 회심 사례와 미리 정한 영적 단계에 관한 논증(한국어판 PDF 148–149면); 폴 워셔, 『회심: 복음의 부름에 대한 참된 반응』, 제3장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제4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두 책의 저술 대상이 어린이 신앙교육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것.↩︎

  16. 요 1:12–13; 딤후 1:5, 3:14–15; 고전 3:5–7. 혈통과 중생의 구별을 유지하면서 교육의 방편을 긍정한다.↩︎

  17.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부흥의 역사적 증언과 후대의 적용에 관한 논의; 암스트롱, 『부흥을 준비하라!』, 제7장. 자료의 일차성·후대 해석·성경적 규범성을 구별하는 원칙은 본문의 방법론적 제안이다.↩︎

  18.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Revival). 개별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은 두 저작의 해석과 독립된 검증을 요구한다.↩︎

  19. Princeton & Slavery, Princeton University, “Princeton’s Founding Trustees,” https://slavery.princeton.edu/stories/founding-trustees . 설립 초기 인물들의 사회적 한계는 대학 자체의 연구를 참조하여 신중히 언급하였다. 각 인물의 개별 행위와 평가를 일괄하여 단정하지 않는다.↩︎

  20. 신 6:6–9; 약 1:22–25; 엡 6:4; 딛 2:7–8. 가정의 일상적 실천과 말씀 교육을 연결한 부분은 성경적 원리의 실천적 적용이다.↩︎

  21. 엡 4:11–16; 딤후 2:2, 3:14–17; 마 28:18–20;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9–90문.↩︎

  22. 폴 워셔, 『회심』, 제1–5장(회개와 믿음), 제6–10장(새 언약과 새 마음); 존 에인절 제임스,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8장(연약한 신자의 낙심에 관한 논의). 교사가 아이의 회심을 최종 판정할 수 없다는 경계는 고전 4:5, 요 3:8과의 종합이다.↩︎

  23. 고전 3:5–7; 빌 1: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8–89문. 신앙교육의 주권성과 인간 책임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종합.↩︎

  24. 신 6:4–25; 시 78:1–8; 요 3:3–8; 딤후 3:14–17. 공동체의 가르칠 책임과 개인 중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구분한 신학적 결론.↩︎

  25. 시 78:4–8; 신 6:4–9; 요 1:12–13; 딤후 3:14–17. 교회와 가정의 세대 전수를 다룬 종합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