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04 · 04 · 부흥과 하나님의 주권

부흥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기도와 전도에 충실하되 부흥의 결과를 인간이 보장할 수 없는 이유를 살펴봅니다.

이안 머리 ·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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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교회가 배워야 할 것

이안 머리(Iain H. Murray),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제1–3장을 중심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더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며, 죄를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대답은 옳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이 모든 일을 충분히 실천한다면 반드시 부흥이 일어날까요? 반대로 아무리 기도하고 전도해도 특별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부흥을 일으키는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인간의 타락과 중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묻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부흥은 교회가 만들어 내야 할 성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교회의 기도와 전도, 목회와 선교, 심지어 사역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까지 달라집니다.

1. 부흥이라는 말보다 먼저 부흥의 실체를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부흥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교회가 성장하거나 많은 사람이 집회에 참석했을 때, 성도들이 새로운 열심을 갖게 되었을 때, 또는 특별한 전도 집회를 개최할 때에도 부흥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폭넓은 용어 사용은 부흥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집회의 이름에 부흥이라는 말을 붙였다고 해서 참된 부흥이 일어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교회가 꾸준히 성장하고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사실과, 역사적으로 특별한 부흥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구별해야 합니다.

부흥을 단순히 침체된 교회가 다시 활력을 얻는 현상으로 한정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오랫동안 영적으로 침체되었던 교회가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사례는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흥이 반드시 침체된 교회의 회복으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북미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역과 태평양 지역의 선교 역사가 그 사례입니다. 아직 교회가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복음이 능력 있게 전파되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회심이나 교회의 성장을 특별한 부흥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평상시에도 말씀을 통해 죄인을 회심시키시고 신자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반면 역사적 부흥에서는 그러한 역사가 평소보다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부흥은 교회의 외적인 성장이나 종교적 열정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본질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의 역사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부흥을 교회의 성장이나 활동의 성과와 동일시한다면, 결국 그 원인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결과에서 찾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

부흥의 가능성과 원인, 인간의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세 가지 견해가 구별됩니다.

구분 핵심 주장 부흥에 대한 입장
① 부흥의 단회성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에 주어지셨으므로 새로운 특별한 부어 주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반복적인 특별 부흥을 부정하거나 경계한다.
② 인간의 노력에 따른 부흥 필요한 영적 조건이나 방법을 충족하면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 부흥을 인간의 노력과 순종에 달린 결과로 본다.
③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부흥 오순절 이후에도 특별한 성령의 역사는 가능하지만 그 시기와 분량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이다.

① 첫 번째 견해 — 부흥의 단회성

첫 번째 견해는 오순절의 단회성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 성령께서 교회에 주어지셨으며, 모든 참된 신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새로운 성령의 부어 주심을 기다리거나 특별한 부흥을 간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이 견해는 오순절이 구속사적으로 유일한 사건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단회성과 그 이후에도 성령께서 특별한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미 교회에 오셨다는 사실이 모든 교회와 신자에게 언제나 동일한 정도로 역사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약성경 자체가 성령의 내주하심과 함께 성령의 충만함과 더욱 풍성한 사역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두 번째 견해 — 인간의 노력에 따른 부흥

두 번째 견해는 부흥이 교회의 노력과 순종에 달려 있다고 이해합니다. 이 입장은 강조하는 내용에 따라 다시 두 방향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전도와 방법을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적절한 전도 방법과 설교, 설득과 조직적인 노력을 사용하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부흥을 적절한 조건에서 농작물을 생산하는 일과 비교한 것도 이러한 이해 때문입니다. 필요한 수단을 충실하게 사용하면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회개와 거룩함을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조너선 고포스(Jonathan Goforth)와 덩컨 캠벨(Duncan Campbell) 등이 이러한 견해와 관련됩니다. 이 관점은 전도 기술보다 성도들의 회개와 순종, 헌신과 거룩한 삶을 강조합니다. 교회가 충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다면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으며, 부흥이 지체되는 것은 필요한 영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두 관점은 강조점이 다릅니다. 하나는 전도의 방법을, 다른 하나는 성도의 영적 상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충실히 행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행하면 특별한 부흥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주장은 서로 다릅니다.

회개와 거룩함, 전도와 기도는 모두 성경적인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를 부흥을 얻어 내는 확실한 조건으로 삼는 순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인간의 행위에 종속시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③ 세 번째 견해 —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부흥

세 번째는 전통적인 '구학파의 견해'(old-school view)입니다.

이 견해는 오순절의 구속사적 독특함을 인정하면서도,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후에도 교회에 성령의 은혜를 특별히 풍성하게 베푸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참된 신자 안에 거하시고 평상시에도 말씀을 통해 회심과 성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동일한 정도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어떤 시기에는 더욱 두드러지고 광범위하게 역사하시며 많은 사람을 회심시키고 교회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고, 회개와 순종에 힘쓰며,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특별한 부흥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견해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만들지 않는 데 있습니다.

3. 찰스 피니의 부흥관은 왜 문제가 되는가?

부흥을 인간의 노력에 따라 일으킬 수 있다는 견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19세기 미국의 전도자 찰스 피니였습니다.

피니는 강력한 설교자였으며, 많은 사람이 그의 집회에서 회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즉각적인 결단을 촉구했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거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미국의 전도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사역에서 실제로 회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주장한 신학과 모든 방법이 옳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집회의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을 뒷받침하는 인간론과 중생론에 있습니다.

피니는 인간의 죄를 주로 의지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의 문제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본성 전체가 부패했고, 죄인은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다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리에 반대했습니다.

이러한 죄론의 차이는 회심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인의 근본적인 문제가 잘못된 선택에 있다면, 적절한 진리를 제시하고 의지의 변화를 강력히 촉구함으로써 회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은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부흥도 반복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반면 개혁주의 신학은 죄인의 문제가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선택에 있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죄인은 자신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돌아갈 능력을 스스로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에는 반드시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은 회개하고 믿어야 하며, 전도자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회개와 믿음을 촉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을 책임이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피니가 사용했던 '불안석'(anxious seat), 곧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자리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설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거나 공개적으로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행동만으로 그 사람이 참으로 중생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전도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의 결단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능력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4. 같은 열심으로 사역했는데 왜 서로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가?

부흥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경과 교회사의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약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반면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는 루디아라는 한 여인이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여는 사건이 특별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바울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거룩한 설교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나타났던 것일까요? 그렇게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복음을 심고 가꾸는 일은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이지만, 영적인 생명을 일으키고 성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사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1740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각성운동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을 때마다 처음과 같은 규모의 영적 각성이 반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찰스 스펄전 역시 런던에서 목회를 시작하던 초기에는 매우 많은 회심자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더 오랜 경험과 깊은 신학적 이해를 가진 설교자가 된 이후에도 초기와 같은 특별한 규모의 회심이 계속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던 윌리엄 찰머스 번스(William Chalmers Burns)는 이후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사역은 스코틀랜드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대규모 부흥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단순히 기도의 분량이나 경건의 수준, 설교자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같은 사람이 더욱 성숙하고 충성된 사역자가 된 뒤에도 과거와 같은 특별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경건과 충성됨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의 신실함과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기에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의 크기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목회와 선교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믿고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동일한 복음을 오랜 세월 충실하게 전해도 눈에 보이는 회심이 적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사역자의 능력이나 헌신의 차이로만 설명하는 것은 성경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와 사역자는 자신이 복음을 충실히 전하고 있는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이 사역의 모든 결과를 인간의 책임으로 돌리는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사역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하는 시기와 규모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은 작은 열매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며, 큰 열매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5. 역대하 7장 14절은 부흥을 보장하는 약속인가?

부흥을 위한 기도운동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땅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충분히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교회와 나라에 부흥을 일으키셔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역사적 맥락과 구속사의 전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성전과 제사, 그리고 그 땅에 임하는 재앙과 회복이라는 구약의 역사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땅을 고친다'는 약속을 모든 시대의 교회와 국가에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언약적 지위와 신약 교회의 지위는 구속사의 전개 속에서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에 약속된 성령의 풍성한 부어 주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 성취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역사하셨지만, 오순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교회에 부어 주신 새로운 구속사적 사건이었습니다(행 2:33).

그러므로 솔로몬에게 주어진 이스라엘의 언약적 회복에 관한 약속을 신약 교회가 특별한 부흥을 얻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직접적인 공식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대하 7장 14절은 오늘날 교회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겸손과 회개, 기도와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개와 기도를 명하신다는 사실과, 그러한 순종이 특정한 시기와 규모의 부흥을 보장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회개하기만 하면 반드시 대규모 회심이나 국가적인 종교 부흥이 일어난다고 약속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성경의 약속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언약과 구속사의 맥락 속에서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면 교회가 특별히 노력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흥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열심히 전도하거나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쓸 필요도 없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오해한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뜻에 따라 이루신다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회개하고 믿으며 순종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폐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특히 순종, 진리, 믿음이라는 세 영역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순종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부흥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거짓과 부정, 교만과 이기심, 성도들 사이의 다툼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실제적인 회개와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부흥을 얻기 위해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둘째, 진리를 지킬 책임입니다. 성경의 권위와 복음의 핵심 교리를 약화시키면서 부흥만을 기대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죄와 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회개와 믿음, 중생과 성화에 관한 진리를 충실히 가르치는 것은 모든 시대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계시하신 진리와 무관하게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셋째, 믿음의 책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믿음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심리적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확신을 근거로 하나님께 결과를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며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교회는 수동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에 더욱 충실하면서 자신의 수고가 그분의 은혜 없이는 아무런 영적 생명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아는 교회입니다.

순종과 진리와 믿음은 부흥을 얻어 내기 위한 거래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언제나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7. 그렇다면 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부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기도하도록 명하셨으며, 기도를 통해 자신의 은혜를 베풀기도 하십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에서 많은 부흥이 간절한 기도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원인과 수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기도가 부흥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은 기도가 부흥을 발생시키는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지만, 인간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결정과 시기를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윌리엄 거널의 비유가 이 관계를 잘 설명합니다. 새벽이 가까워지면 닭이 크게 울지만, 닭이 울기 때문에 해가 뜨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특별한 부흥을 앞두고 교회에 간절한 기도가 일어날 수 있지만, 그 기도를 부흥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기도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들을 기도의 자리로 이끄시는 것 자체가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기도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힘으로 부흥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수록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거듭나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참된 회개와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행위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는 겸손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부흥을 일으키셔야 한다고 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간구하되, 그 약속을 인간이 정한 일정과 결과를 보증하는 계약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기도의 응답이 언제나 한 세대의 생애 안에서 모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다른 사람이 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자신이 기도하던 결과를 직접 보지 못하고 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특별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겸손히 간구하는 일입니다.

8.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교회는 실패한 교회인가?

부흥을 인간의 노력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기 쉽습니다. 부흥이 일어나지 않은 교회는 반드시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거나, 거룩하지 않았거나,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판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성경과 교회사의 사실에 비추어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건한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평생 충실하게 사역했지만 특별한 대규모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던 시대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도 신학적 이해나 인격적인 성숙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특별하게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반드시 더 거룩하거나 우수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특별한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불충성한 사역자였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오랜 세월 수적으로 크게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고,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가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복음을 신실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교회는 실제적인 영적 건강을 누리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부흥이 없다는 것과 교회에 영적 생명이나 참된 성장이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모이고 대규모 회심이 보고된다고 해서 그 사역의 모든 가르침과 방법이 정당하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도구를 선택하시며,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시기와 규모뿐 아니라 그 목적도 결정하십니다. 어떤 부흥은 새로운 교회와 선교운동을 일으켰지만, 다른 경우에는 장차 닥칠 핍박과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교회를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 사역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하지만, 특별한 부흥의 경험 여부만으로 교회의 신실함과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교회가 궁극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부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을 가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부흥을 사모하면서도 어느 순간 하나님 자신보다 부흥의 성과에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많은 회심자와 예배 참석자, 과거의 영광을 회복한 교세, 역사에 기록될 만한 특별한 사건이 신앙의 중심적인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성과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에서 놀라운 권능을 경험하고 돌아왔을 때, 그러한 능력의 나타남보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20).

교회는 많은 사람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의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역의 성공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가장 근본적인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은혜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특별한 부흥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베푸실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그 선물 자체를 더 갈망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부흥을 향한 가장 성경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붙잡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고, 죄에서 돌이키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많은 죄인을 회심시키시는 특별한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반드시 부흥을 주시도록 만드는 조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흥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흥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그분이 명하신 말씀과 순종과 복음 전파의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교회가 부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며, 동시에 부흥을 인간의 성과로 자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글을 읽은 후 생각해 볼 질문

  1. 우리 교회는 부흥을 무엇으로 판단하고 있습니까? 집회의 규모와 참석자 수입니까, 아니면 복음이 가져오는 실제적인 변화입니까?
  2. 우리는 기도와 전도와 회개를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한 부흥을 얻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3. 기대한 만큼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사역을 성경적으로 점검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4. 우리가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부흥을 경험한 교회라는 명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원문 및 편집 안내

주요 자료: 이안 머리(Iain H. Murray),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 제1장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제2장 「찰스 피니의 부흥관 비판」
  • 제3장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

이 글은 원저의 세 장을 순서대로 축약한 요약문이 아니라, '부흥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주요 신학적 논증과 성경적·역사적 사례를 재배열한 해설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견해와 사례는 이안 머리가 해당 저술에서 소개하고 평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현대 교회와 선교에 관한 질문과 적용은 그 논증에 근거하여 독자의 성찰을 돕도록 재구성했습니다.

기존 읽기자료 본문을 생략 없이 옮겨 각각 독립 페이지로 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