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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VAL THEOLOGY · BOOK SUMMARY

기도합주회

조나단 에드워즈

Concerts of Prayer · 부흥과개혁사 한국어 개정판 · 정성욱·황혁기 옮김

제1–3부 및 맺음말 · 인쇄 35–202쪽 · 총 16개 장 / 106개 소제목

『기도합주회』 한국어판 표지

책 소개

1748년에 출판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도합주회』는 교회의 부흥과 그리스도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여러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기도해야 할 성경적·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저작입니다. 1744년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이 시작한 기도운동과 1746년의 청원서를 배경으로, 에드워즈는 스가랴 8장을 비롯한 성경의 약속을 해석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기도를 함께 논의합니다.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것은 정해진 기도 시간이나 인간의 열심이 부흥을 만들어 낸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참된 영적 회복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성령의 은혜이며,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겸손하게 기도합니다.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성도들의 시간적 합의는 기도의 능력을 조작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표현하고 기도의 의무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도록 돕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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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기도합주회란 무엇인가4개 장
01기도합주회의 성경적 근거35–40쪽

스가랴 8장이 말하는 교회의 종말적 영광

에드워즈는 스가랴 8장 20–23절에서 여러 성읍과 강대한 민족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장면을 장차 그리스도의 교회가 누릴 세계적인 확장의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이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하는 역사적 문맥에 놓여 있지만, 그는 이 예언의 궁극적 범위가 당시 유대 공동체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여러 민족이 유다 사람의 옷자락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이방인의 광범위한 회심과 하나님 백성의 연합을 표현합니다. 에드워즈는 사도 시대에 이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했으나 선지자들이 바라본 영광의 충만함은 아직 남아 있다고 이해합니다. 이와 같은 장래 소망이 세계적인 연합기도를 요청하는 근거가 됩니다.

선지자들은 미래에 교회가 누리게 될 영광을 알았다

에드워즈는 이사야 60장과 66장, 미가 4장 등에서 열방이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오고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며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약속을 제시합니다. 예루살렘의 회복, 황폐한 곳의 번영, 하나님의 임재, 여러 민족의 회심은 선지서들 사이에 반복되는 공통 주제입니다.

그는 이것을 단지 서로 비슷한 종교적 표현의 우연한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여러 선지자를 통해 동일한 구속의 목적을 드러내셨다고 보며, 스가랴의 예언을 다른 선지서 및 메시아의 구속사역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가랴 8장의 예언은 종말의 교회를 통해 완성된다

에드워즈는 예루살렘의 재건과 포로의 귀환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사건들이 장차 나타날 더 충만한 영적 구원의 예표라고 이해합니다. 가까운 시대의 역사적 성취와 이후에 나타날 더 큰 성취가 한 예언의 지평에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동서로부터 하나님 백성을 모으고 열방이 주께 나아온다는 약속은 포로 귀환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임할 더욱 풍성한 회심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을 기대하며, 이미 약속된 은혜를 이루시도록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02스가랴 8장이 보여 주는 기도합주회에 관한 여섯 가지 메시지41–55쪽

기도합주회는 교회의 의무다

스가랴 8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자고 권면합니다. 에드워즈는 이 장면을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리라는 일반적인 예언으로만 보지 않고, 그 큰 회복에 앞서 특별한 간구가 일어나리라는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스가랴 12장의 은총과 간구하는 영에 관한 말씀도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소망한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부수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주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합기도는 교회의 중요한 의무입니다.

기도합주회를 통한 유익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씀은 필요한 축복을 요청하는 수준을 넘어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뜻을 지닙니다. 에드워즈는 시편 63편과 73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최고의 행복으로 고백하는 성도의 마음을 찾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의 은혜로운 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시는 듯한 표현은 그분이 피조세계에서 실제로 사라지셨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이 영적 침체 속에 그분의 은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기도합주회의 핵심 목적은 외적인 교회 성장이나 종교적 행사의 활성화 자체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하나님 임재의 풍성한 나타남과 참된 경건의 회복입니다.

기도합주회는 전세계 교회가 동참해야 한다

스가랴의 예언은 한 도시와 민족을 넘어 여러 성읍과 강대한 나라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에드워즈는 이를 교회의 장래 영광이 세계적인 범위를 가진다는 증거로 읽으며,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구하는 기도의 마음도 여러 지역의 백성에게 부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기도하는 모습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신앙적인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합기도는 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열방의 회심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드려져야 합니다.

기도합주회는 구체적인 합의를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스가랴 8장의 대화에서 한 성읍 사람들이 다른 성읍 사람들에게 함께 은혜를 구하자고 제안하고, 이를 들은 사람들이 동참 의사를 밝히는 모습을 분석합니다. 이 장면은 공동의 관심이 막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권면하고 응답하는 명시적인 합의로 드러남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나도 가겠노라’라는 말이 권면을 받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응답으로 이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언어적 관찰을 통해, 기도합주회는 지도자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의 신앙적 목적을 이해한 성도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기도합주회는 신속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에드워즈는 스가랴 8장의 반복적 히브리어 표현을 살피면서 하나님을 찾는 일이 단지 빠르게 시작되어야 할 뿐 아니라 확실하고 간절하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반복법은 명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행동으로 옮기려는 진지한 결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영적 결핍을 깨달았다면 기도를 무기한 연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두 번의 특별 기도회를 개최한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곧바로 기도하고, 은혜의 성취가 더디게 보이더라도 인내하며 그 기도를 이어가야 합니다.

기도합주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에드워즈는 앞선 논증을 종합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영적 회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연합하고 기도하는 일이 하나님께 합당한 경건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스가랴의 예언에서 하나님을 찾는 공동의 기도와 교회의 장래 회복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합주회가 부흥을 만들어 내는 인간적 기술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기다리며 그 은혜를 구하도록 돕는 방편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의 청원에 성경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03기도합주회 청원서에 대한 역사적 배경56–64쪽

기도합주회는 목사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 잡은 공감대

1744년 10월 스코틀랜드의 여러 목회자들은 교회와 세계의 영적 상태를 논의하면서 참된 경건의 쇠퇴와 여러 나라의 비참함을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회복하시며 여러 민족을 구원하시도록 특별히 기도할 필요에 공감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기도에 머물지 않고 다른 교회와 성도들을 설득하여 참여하도록 하며, 기도를 지속하고 확산할 실제적인 방법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기도합주회는 개인의 특별한 체험에 근거한 사업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교회의 공동 필요를 인식한 가운데 시작한 연합기도 제안입니다.

기도합주회를 우선 2년 동안 하자

최초의 합의는 2년 동안 매주 토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에 각자가 편리한 시간을 구별하여 기도하고, 매 분기 첫 화요일에는 반나절이나 하루를 특별 기도에 드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골방, 가정, 사적인 모임과 공적인 기도회 모두 참여 방식으로 허용했습니다.

약속을 율법처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형편에 따라 다음 날에 기도할 수도 있었고 특정한 시간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게으름과 망각 때문에 기도를 중단하지 않도록 스스로 진지한 결심을 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기도합주회 시간을 토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으로 정하다

토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은 복음이 선포되는 주일 예배와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제안자들은 복음의 설교가 성령께서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므로, 그 말씀의 사역에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이때 드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성도들이 평일의 여러 일에서 벗어나 말씀과 경건한 묵상에 집중하기 쉬운 시간이었습니다. 분기별 첫 화요일은 기억하기 쉽고 월요일보다 편리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선택되었습니다. 시간 선택의 근거는 거룩함의 차등이 아니라 교회의 실천적인 유익입니다.

기도합주회는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기도 생활의 촉진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가르치셨지만, 성도들은 평범한 일상과 자기중심적인 관심 때문에 중요한 기도 제목을 잊거나 미루기 쉽습니다. 에드워즈는 규칙적으로 되돌아오는 기도 시간이 이 의무를 기억시키고 지속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정해진 시간은 새로운 종교적 권위를 창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게으름을 경계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의 회복을 계속 마음에 두도록 돕는 표지입니다. 합의된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합주회를 처음 제안한 사람들이 생각한 영적 유익

제안자들은 합의된 기도가 개인·가정·공동체 기도 안에서 성령의 풍성한 역사를 간구하도록 자극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또한 먼 나라의 성도들도 같은 시간에 동일한 목적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여자들에게 특별한 활력과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동시성 자체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별도의 영적 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소망을 품은 성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사랑과 책임감을 더 깊이 느끼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도록 격려받는 것이 중요한 실제적 유익입니다.

기도합주회 기간은 변경할 수 있다

제안자들은 처음부터 기간을 무기한 고정하지 않고 2년을 시행한 뒤 경험을 평가하기로 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겪는 실제적인 어려움과 유익을 듣고, 기도 시간이나 기간을 더 적절하게 조정할 기회를 마련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기도합주회의 방법을 신성불가침의 제도로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성경적 의무는 변하지 않지만, 그 의무를 이루기 위해 결정한 구체적인 일정과 운영 방식은 상황에 따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주회, 처음엔 개인적인 편지 교환을 통해 전파됐다

처음에는 공식적인 출판물보다 개인적 대화와 서신 교환을 통해 제안을 전달했습니다. 이는 서로의 상황과 의견을 충분히 듣고 반대나 의문에 응답하기에 유익한 방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점차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및 북아메리카의 성도들도 관심을 갖고 동참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에든버러·글래스고·애버딘·던디의 참여를 언급하며, 1743년 11월 로브가 보스턴의 프린스에게 보낸 편지에 에든버러에서 30개가 넘는 새 기도모임이 있었다는 기록을 소개합니다. 글래스고에서도 약 45개 모임이 연합에 참여했다고 전합니다. 이 사례들은 실제 기도모임들의 확산을 보여 줍니다.

기도합주회의 공식적인 제안서가 각국에 발송되다

첫 2년이 끝나갈 무렵 목회자들은 세계 각 지역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도합주회의 지속과 확산을 요청하는 공식 청원서를 인쇄했습니다. 개인적인 서신 교환의 장점은 유지하면서,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도 제안의 목적과 방식을 분명히 알리려 했습니다.

청원서는 뉴잉글랜드와 북아메리카 식민지 여러 지역에 배포되었고 약 500명에게 전달되었다는 기록도 소개됩니다. 일부 편지에는 스코틀랜드 목회자 12명의 서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청원서를 제시하여 독자들이 실제 제안의 내용을 판단하도록 합니다.

04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의 기도합주회 청원서 전문65–72쪽

1. 기도합주회의 처음 목적과 방법에 대해 개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청원서는 기도합주회의 목적이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간구를 지속적으로 시행하도록 돕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토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 분기의 첫 화요일을 정한 것은 다른 의무와 충돌하지 않으면서 기도를 돕기 위한 편의였습니다.

최초의 2년이 끝나갈 때 각 지역 참여자들은 일정과 기간에 관한 경험을 나누고 개선책을 제안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이 제안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불변의 규정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의 협의로 발전하는 실천적 결의였습니다.

2. 기도합주회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기도합주회에 동의한다고 해서 어떤 날이든 무조건 그 시간에 세상 일을 모두 중지하거나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말아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닙니다. 청원서는 개인의 형편을 고려한 자유로운 변경을 허용하고, 특정한 날을 거룩한 절기로 강요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 유연성은 성도들의 양심을 보호하면서도 기도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본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간구하는 데 있지 시간표 자체를 지키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3. 기도합주회에 대한 동기 부여를 책과 설교를 통해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성도들은 중요한 의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잊거나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청원서는 목회자들과 글을 쓰는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 연합기도의 성경적 근거와 필요성을 설명하는 소책자들을 집필·배포하기를 권합니다.

또한 분기별 특별 기도의 날에 가까운 주일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설교 주제로 삼을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행사 홍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이해와 책임 의식을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말씀 교육입니다.

4. 기도합주회는 범국가적으로 초교파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청원서의 요청은 한 교단이나 정치 집단, 특정한 종교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안자들은 생명력 있는 기독교와 경건의 능력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특별 기도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널리 참여하기를 바랐습니다.

교리와 교회 정치에서의 차이를 전부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공동의 신앙적 목적을 위해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따라서 기도합주회는 새로운 교파 조직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교회의 연합을 표현하는 실천입니다.

5. 기도합주회 청원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제안자들은 개인적인 서신을 통한 확산이 유익했지만 그 방식만으로는 먼 지역의 모든 성도에게 소식을 전달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공식 청원서를 인쇄하여 기존의 서신 교환을 보완하고자 했습니다.

이 문서는 새로운 명령을 반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연합기도의 목적과 방법을 설명하는 초청장이었습니다. 더 넓은 지역의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자유롭게 동참할 기회를 얻기를 바랐습니다.

6. 기도합주회를 지속하는 기간은 2–7년 사이가 적절하다

몇몇 참여자들은 최초의 2년보다 훨씬 긴 기간, 곧 7년 정도 지속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청원서 작성자들도 이러한 제안을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지나치게 긴 기간을 처음부터 확정할 경우 참여를 권면하는 열정이 줄어들 가능성도 고려했습니다.

따라서 기간에 관한 결정은 교회의 유익과 지속성이라는 목적에 따라 조정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히 몇 년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과 폭넓은 연합입니다.

7. 기도합주회를 지금 중단하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청원서는 교회와 사회의 심각한 영적 상태를 고려할 때 처음 합의한 2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영적인 어두움과 혼란 속에 있고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진정한 개혁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으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계속 부르짖어야 합니다. 1746년 8월 26일자로 마무리된 이 청원서는 기도의 지속과 새로운 참여를 함께 요청합니다.

제2부우리는 왜 기도합주회에 참여해야 하는가7개 장
01종말의 영광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75–91쪽

세계가 돌이킬 때에 대한 예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장차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크고 광범위한 성령의 부으심과 그리스도 나라의 진보를 예언한다고 확신합니다. 창세기 12장과 22장의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만민의 복, 시편 72장의 메시아를 섬길 열방, 이사야 2장의 만민의 하나님 경배, 마태복음 13장의 누룩 비유를 함께 제시합니다.

그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산되기 시작했지만 선지서에 그려진 규모의 전 세계적인 회심과 영적 번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지나온 역사를 예언의 충만한 성취와 혼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더 큰 약속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성부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상속하도록 세우신 분입니다. 에드워즈는 시편 2편의 열방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약속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복, 이사야 45장에서 모든 무릎이 하나님 앞에 꿇게 된다는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마지막 심판에서 드러날 뿐 아니라 복음의 전파와 성령의 은혜로 사람들의 마음에 인정되고 순종받는 방식으로도 역사 속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왕이시라는 사실이 바로 더 넓은 통치의 나타남을 소망하는 근거가 됩니다.

다니엘 2장의 환상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권

다니엘 2장에 등장하는 금·은·놋·철과 진흙으로 이루어진 큰 신상은 강대한 인간 제국들을 상징합니다. 제국들은 차례로 흥망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돌이 신상을 무너뜨리고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하게 됩니다. 에드워즈는 이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해석합니다.

인간의 권력으로 세워진 나라들은 제한된 시대와 영토에 머물고 결국 무너지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모든 제국을 능가하며 영원히 존속합니다. 돌이 세계에 가득하게 된다는 상징은 그 나라의 광범위한 승리를 나타내며 아직 충분히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7장의 환상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권

다니엘 7장에서는 네 마리 짐승이 세상의 강대한 제국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정복하고 폭력을 행사하지만 결국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며 모든 백성과 민족과 언어가 그를 섬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에드워즈는 이 표현을 이전 제국의 과장된 권력 묘사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보편성을 지닌 약속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여러 민족에게 전파되는 영원한 복음과 이를 연결하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계에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 주는 구약의 다양한 표현들

에드워즈는 바닷물이 바다를 덮음처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하리라는 이사야 11장 9절을 주요 증거로 듭니다. 그는 이처럼 강력한 표현을 단순한 동양적 과장법으로 축소하는 해석을 반대합니다. 성경은 실제로 참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을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서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와 점차 깊어지고 바다까지 소성시키는 물, 이사야 54장의 장막을 넓히라는 명령, 우상숭배가 사라지리라는 예언들도 그에게는 동일한 장래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해석은 세상 역사가 끝나기 전에 교회가 장기간 영광스럽게 번영하리라는 그의 후천년적 전망에 속합니다.

세계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신약의 예언들

에드워즈는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끌겠다고 하신 요한복음 12장을 구속사역과 세계적인 복음 확장의 연결점으로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것은 실제로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교회로 모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1장의 유대인의 충만함과 이방인의 충만함에 관한 말씀도 중요합니다. 그는 초기 유대인·이방인 회심을 첫 열매로 이해하며 장차 그들 가운데 훨씬 풍성한 수확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합니다. 따라서 세계 복음화는 구속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얻으실 열매의 확장을 뜻합니다.

아직은 사단의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요한계시록 16·19·20장을 연결하면서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대적을 이기고 세상 가운데 나라를 드러내실 것을 기대합니다. 사탄의 결박과 그리스도의 승리 장면을 그는 역사 속 교회의 장래 영광과 관련하여 해석합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독교 공인도 이전과는 다른 큰 변화였으나 사탄의 영향력이 소멸한 최종적인 영광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박해와 잘못된 신앙, 죄악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더 큰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직도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이 많다

에드워즈는 18세기에 알려진 지리적 현실을 들어,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가 곧 전 세계의 회심을 뜻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로마 제국의 영토는 지구 전체와 비교할 때 제한적이었고 새로 발견된 지역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민족 가운데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열방의 회심을 제한된 제국의 종교적 변화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의 광대함을 근거로 세계적인 성령의 역사를 위한 기도가 아직 긴급하다고 강조합니다.

아직 세계 복음화, 예언이 성취됐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의 약속이 일시적인 교세 확장만이 아니라 오랜 평화와 번영, 참된 경건과 하나님 지식의 광범위한 확산을 포함한다고 봅니다. 이사야 60·65장, 시편 72편, 요한계시록 20장 등의 예언을 장기간 지속되는 교회의 영광과 연결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한 기간의 숫자를 계산하는 일보다, 선지자들이 묘사한 풍성함과 지속성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의 부분적인 성취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더 큰 번영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경험한 평화와 번영의 기간은 아주 짧았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로마 제국은 내전과 외적의 침략, 정치적 불안과 교리적 분열을 겪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평화도 오래가지 않았고, 교회는 참된 신앙이 활발했던 시기에도 핍박과 갈등을 겪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과거 교회의 외적인 성공을 성경이 예언한 장기간의 영광스러운 번영과 동일시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논증은 정치적 공인과 교회의 참된 영적 상태를 구별하며, 영적 번영은 단순한 사회적 지위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성경에 예언된 교회의 영광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나라와 적그리스도에 관한 표상, 로마서 11장의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임할 은혜를 종합합니다. 그는 이 모든 예언이 과거 어느 한 시기의 기독교 확장으로 완결되지 않았다고 결론짓습니다.

초대교회의 회심은 중요한 시작이었으나 장차 더 큰 구원의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성경의 약속을 읽는 독특한 종말론적 방식이며, 모든 개혁주의 해석자에게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는 결론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왕국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왕국

에드워즈는 제국들의 흥망, 전쟁과 변혁을 통해 인간의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목적을 향해 진행되며, 결국 마지막 왕국은 하나님의 독생자께 속할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핍박과 침체 가운데 있는 교회가 낙심하지 않도록 합니다. 현재의 조건이 하나님의 목적을 결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보존하고 자신의 나라를 영광스럽게 나타내실 것이므로 성도는 믿음과 기도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02종말의 영광은 말할 수 없이 크다92–99쪽

그 날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탁월하게 드러난다

에드워즈가 장래의 교회 번영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첫째 이유는 그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특별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의 감추어진 임재,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던 대제사장과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모세를 회상하며, 성도들이 훨씬 풍성히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될 미래를 설명합니다.

이사야 24·60장에 나오는 해와 달의 빛을 능가하는 영광의 묘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로운 교제가 충만해질 것을 상징합니다. 외적인 성공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이 교회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 날에는 지식과 총명, 특히 영적 지식이 크게 증가하게 된다

에드워즈는 이사야 25·32장과 예레미야 31장의 약속을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진리를 참되게 이해하는 시대를 기대합니다. 단순히 인간의 과학이나 학문이 발전한다는 뜻이 아니라 죄와 구원, 그리스도의 은혜와 거룩함에 관한 영적 이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지도자와 학자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어린아이와 연약한 성도에게도 널리 나타날 것입니다. 스가랴 14장의 말방울과 집안의 솥까지 거룩하게 구별되는 모습처럼, 영적인 변화는 예배 시간뿐 아니라 일상생활과 노동, 경제 활동에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 날에는 경건과 참된 기독교가 최상의 위치에 있게 된다

역사 속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경멸과 박해를 당한 때가 많았지만, 에드워즈는 장차 참된 신앙이 사회 곳곳에서 존중받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사야 49장에 나타나는 왕과 왕비의 보호, 시편 113장에서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 그 근거로 제시됩니다.

그는 참된 경건이 사회의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사랑과 평화가 확산될 것을 소망합니다.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는 예언을 그 시대의 화평과 연결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근원은 정치적 강제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 날에는 교회가 영영한 아름다움을 회복한다

에드워즈는 교회가 진리와 거룩함, 사랑과 질서 안에서 하나 될 미래를 기대합니다. 잘못된 교리와 종교적 미신, 교회 내부의 분열이 사라지고 여러 민족이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형제자매로 교제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예레미야 32장의 한마음과 한 길이라는 약속을 중요하게 사용합니다.

그는 교회를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과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에 비유합니다. 영적 일치와 함께 건강·풍요·기쁨에 관한 선지서의 묘사도 살피며, 지상과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 특히 구속의 열매를 얻으신 그리스도께 이 시대가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교회에 약속된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나라가 더욱 빛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면 거룩함과 연합의 회복을, 죄인을 사랑한다면 회심과 구원을, 창조세계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더욱 나타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장차 약속된 영광은 관념적인 종말론에만 머무는 주제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무엇을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동기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연합기도의 가치와 긴급성을 보여 줍니다.

03그리스도께서 종말의 영광을 위해 구속사역을 이루셨다100–108쪽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져오는 축복의 총체는 성령 하나님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주시려는 가장 크고 포괄적인 축복이 성령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부는 구속자를 보내시고 성자는 순종과 희생으로 구속을 이루시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실제로 성도에게 적용하십니다. 성령은 단지 영적 축복 중 하나가 아니라 성도의 지식·거룩·위로·기쁨에 내주하며 역사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주님이 보혜사를 약속하신 말씀과 사도행전 및 갈라디아서의 성령 약속을 통해 이 주장을 발전시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도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달하시는 역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떠나심이 제자들에게 유익한 이유를 보혜사의 오심과 연결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33절은 높임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약속된 성령을 받아 교회에 부어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에드워즈는 오순절을 십자가와 승천에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구속의 열매가 전달되는 사건으로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신 머리로서 지체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자기 백성의 거룩함과 연합을 위해 기도하신 사실도 그리스도의 구속 목적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이 이미 완성된 구속의 열매가 나타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축복이 특별하게 베풀어지는 때다

에드워즈는 장차 복음이 세계로 확산되고 성령께서 풍성히 역사하실 때 구속받는 사람들의 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천 년 동안 인구가 백 년마다 두 배가 되거나 오십 년마다 두 배가 된다는 가정적 계산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 계산으로 정확한 인구 수를 예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열매가 장기간 쌓일 때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 합니다. 참된 성도의 수가 여러 민족으로 확대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고난과 죽음으로 얻으신 구원의 풍성함이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 시기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다양하다

에드워즈는 선지서가 장차 그리스도의 구속 열매가 풍성히 나타날 때를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 구속의 해라고 부르는 데 주목합니다. 다니엘서의 구원자가 통치하는 나라, 추수의 이미지, 그리스도의 승리와 신부의 혼인 등 다양한 성경적 표상도 같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묘사한다고 봅니다.

이 표현들은 서로 독립적인 감격을 조성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는 여러 측면을 보여 줍니다. 그 시대에는 죄와 사탄의 지배가 제한되고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백성이 기쁨 가운데 그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날 이전에 경험하는 축복은 단지 맛보기에 불과하다

에드워즈는 현재까지의 성령의 역사가 참된 것이지만 장차 나타날 풍성한 은혜에 비하면 새벽의 빛이나 추수 전의 첫 열매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풍성한 수확을 미리 보여 주듯 초기의 회심과 교회의 확장은 더 큰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게 합니다.

그는 이사야 53장에서 고난받는 종이 자신의 수고한 열매를 보고 만족할 것이라는 말씀, 에베소서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셔서 교회를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세우신다는 말씀을 연결합니다. 장차 풍성한 구원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날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들의 구속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에드워즈는 요한복음 17장의 중보기도와 히브리서 5장에서의 눈물의 간구를 연결하여, 성도들도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의 거룩함과 연합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기도합주회는 완성된 구속에 인간의 공로를 더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신 은혜가 성령의 역사로 풍성히 적용되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신 목적을 자신의 소망과 기도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04모든 피조물이 종말의 영광을 고통 중에 기다리고 있다109–115쪽

모든 피조물은 지금 탄식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로마서 8장 19–22절의 피조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기다린다는 말씀을 교회의 미래 회복과 연결합니다. 사람의 타락은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창조세계의 사용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햇빛과 비, 땅의 열매와 동물 같은 선한 피조물들이 인간의 악한 욕망과 불의한 목적에 이용됩니다.

피조물 자체가 도덕적 죄의 주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선한 목적을 위해 지으신 세계가 타락한 인간 아래서 그 목적에 어긋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세계의 현재 상태도 하나님의 구속 목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피조물들이 허무함에 굴복하는 지금의 상태는 오래 가지 않을 것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질서를 계속 보존하시지만 그 질서가 죄에 남용되는 상황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복음 전파를 통해 피조물의 해방이 부분적으로 시작되었고 장차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대에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해방을 이미 역사 속 부흥과 동일시하지는 않습니다. 피조세계의 최종적인 회복은 마지막 심판과 구원의 완성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는 구속의 시작, 역사적 확장, 최종적인 완성이라는 구별 안에서 로마서 8장의 탄식을 이해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영광의 날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에드워즈는 피조세계의 변화와 인간 역사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고 설명합니다. 시계의 여러 부속품이 정해진 시간에 종을 울리기 위해 움직이고, 마차의 바퀴가 목적지로 향하는 것처럼 세상의 사건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과 정치적 격변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전에 큰 고통이 따를 수 있듯,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드러나기 전에 세계에는 충돌과 환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건의 의미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하려는 에드워즈의 관점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영광스런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이 기다리는 해방은 창조세계가 죄와 인간의 악한 이용 아래 묶여 있는 상태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에드워즈는 참된 경건이 확대될 때 피조세계도 이전보다 더 합당한 목적으로 사용되며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은 산과 나무, 강과 바다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묘사합니다. 에드워즈는 이사야 44·49장과 시편 96·98편을 언급하면서, 장차 회복이 단지 종교조직의 성공을 넘어 창조의 선한 목적을 나타내는 일과도 연결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피조물도 모두 영광의 날을 고대한다

참된 성도는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 교회 전체의 회복을 사랑합니다. 에드워즈는 시편에서 예루살렘을 가장 큰 기쁨보다 귀하게 여기고 시온의 돌과 티끌까지 사랑하는 고백을 인용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참된 애정을 보여 줍니다.

누가복음 2장의 시므온과 안나처럼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태도는 모든 시대의 성도가 본받을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그 성취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늘에 거하는 성도들과 천사들도 영광의 날을 기다린다

에드워즈는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늘의 천사들과 요한계시록 19장에서 하나님의 승리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찬양하는 하늘 무리를 떠올립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번영이 지상의 성도만 아니라 하늘의 거룩한 존재들에게도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는 한 지역 교회의 현안만을 해결하려는 일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모든 피조물이 소망하는 구원의 목적과 연결된 기도입니다.

05교회는 종말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116–135쪽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은 성령 충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백성이 구할 가장 위대한 축복을 성령의 풍성한 임재와 역사로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치신 뒤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성령께서는 회심과 거룩함과 위로를 주시므로 교회의 근본적인 필요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에스겔 36장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고 황폐한 성읍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그들이 그 일을 구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기도의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주권적인 하나님께서는 목적과 함께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도 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기도는 끈질기게 하라

이사야 62장 6–7절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의 찬송이 되게 하실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에드워즈는 이 본문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담대하고 끈질기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기도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바꾸려는 힘겨루기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교회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잠시 기도한 후 응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때까지 계속 간구합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 세 가지 기도는 영광의 날의 도래를 위한 것

에드워즈는 주기도문의 앞부분, 곧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며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세 간구가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받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며 성령의 은혜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 그 간구들의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그는 이사야 40장과 다니엘 2·7장, 스가랴 14장의 예언을 연결하면서 주기도문의 간구가 장차 역사 속에서 더욱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필요보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가르치셨으므로 성도의 모든 기도 역시 하나님 영광의 목적 아래 놓여야 합니다.

시편에 있는 대부분의 기도도 영광의 날을 위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시편의 많은 기도가 개인적 고통의 해결을 넘어서 시온의 회복,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 열방 가운데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고 설명합니다. 시편에는 교회의 이름으로 드리는 간구, 메시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장래 승리를 예언하며 찬양하는 노래가 함께 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간구하는 일이 새로운 유행이나 특별한 소수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구약 시대부터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고 열방이 그분의 영광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교회의 회복은 기도에 대한 응답

선지서에는 하나님 백성이 위기 속에서 부르짖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여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구조가 자주 나타납니다. 에드워즈는 이사야 51장과 63–64장, 호세아와 예레미야의 예언을 제시하며, 교회의 영광스러운 구원은 하나님을 찾는 성도의 간구와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갈라디아서 4장 19절을 언급합니다. 기도는 의무적인 낭독 이상의 것입니다. 교회의 죄와 연약함을 깊이 느끼고 회복을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는 간절한 사랑의 수고입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수많은 약속

하나님은 성도에게 기도하라는 명령뿐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과 번영에 관한 약속을 성경 곳곳에 기록하신 것은 성도가 그 약속을 근거로 기도하도록 격려하시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의 승리와 요한계시록 마지막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약속과 간구를 연결합니다. 성도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운명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신실하심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강력한 기도의 영이 임할 그 때가 멀지 않다

에드워즈는 교회가 자신의 영적 빈곤을 깨닫고 간절히 성령을 구하기 시작할 때 이를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의 중요한 조짐으로 기대합니다. 이사야 41장의 목마른 자에게 강과 샘을 주신다는 말씀과 요한복음 7장의 생수에 관한 가르침을 연결하여 영적 메마름 속에서 성령을 간구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시편 102편에서는 시온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신다고 말합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세대처럼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 교회의 회복을 위해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시대에 대한 그의 기대는 하나님이 정한 날짜를 계산한 예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 통치는 성도들의 기도와 병행한다

요한계시록 8장에서는 일곱 나팔이 울리기 전에 성도들의 기도가 향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에드워즈는 이를 하나님께서 세계를 다스리시는 과정에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기억하시고 사용하신다는 증거로 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는 찬양도 성도의 오래된 간구의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주권을 통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수단 가운데 기도를 두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교회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에드워즈는 이사야 4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자신의 손으로 하신 일에 관해 구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필요를 모르시기 때문에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녀가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은혜의 근원인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택하신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회의 진리와 거룩, 위로와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은혜 줄 기회를 기다리신다

에드워즈는 이사야 30장의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신다는 말씀과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연결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녀의 음성을 기뻐하시는 분이며, 영적으로 침체된 교회가 자신을 찾을 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도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바꾸거나 그분을 설득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시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자비로운 분이시며, 그 약속과 사랑 때문에 성도는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기도의 실례들이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에드워즈는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님이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일, 여호수아의 기도와 전쟁의 승리,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의 위협 가운데 기도한 일, 다니엘과 느헤미야가 포로 귀환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한 일을 차례로 제시합니다. 삼손이 마지막에 힘을 구하여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 사례도 언급합니다.

그는 이 사건들을 장차 교회에 베푸실 더욱 큰 구원의 예표로 이해합니다. 약속을 알고도 기도를 멈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약속을 붙들고 간구했던 다니엘처럼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성령이 부어진 것은 기도의 응답

누가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께서 임하신 것으로 기록됩니다. 에드워즈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임하신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성령 체험을 연결하며 기도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역사와 연관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은 승천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예루살렘에 머물며 합심하여 기도했고, 오순절에 약속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사건을 세계 복음 전파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시작으로 보며, 기도와 성령의 역사 사이의 성경적 연결을 보여 주는 선례로 사용합니다.

성령은 기도하는 자에게 임하신다

에드워즈는 예수님의 초림을 기다리던 시므온과 안나처럼 약속을 사모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한 기쁨으로 맞이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에 힘쓴 제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교회 전체의 회복을 갈망하는 성도는 그 은혜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시편 122편의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라는 말씀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번영과 거룩함을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의 주권적 은혜를 구하는 일이 성도에게 약속된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06기도합주회를 해야 할 현재의 도덕적·영적 상태 때문이다136–148쪽

영적인 재난과 비참함은 부흥을 사모하게 한다

에드워즈는 성경의 약속뿐 아니라 18세기 기독교 세계의 도덕적·영적 침체를 기도합주회의 긴급한 이유로 제시합니다. 여러 지역에서 불신앙과 사치, 이단적 가르침과 사악함이 늘고, 교회의 생명력 있는 경건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입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사회 문제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의 쇠퇴를 더욱 심각하게 여깁니다. 인간의 개혁과 교육만으로 영적인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성령께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영적 비참함의 상태는 거의 모든 지역에 나타났다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분쟁과 불화, 뉴잉글랜드의 경건 쇠퇴와 목회자에 대한 경멸, 권징의 약화와 교회 분열을 지적합니다. 특히 과거 청교도적 신앙의 토대가 약해지고 신앙의 진정성과 질서를 놓고 다툼이 발생한 점을 심각하게 봅니다.

최근 각성운동 가운데 성경에 비추어 분별해야 할 열정주의와 기이한 종교 관행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혼란의 해결책을 영적인 무관심이나 부흥의 포기에서 찾지 않습니다. 참된 성령의 부으심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더욱 간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적그리스도적인 정권의 발흥

에드워즈는 영국에서 개신교의 정치적 지위를 약화시키려는 움직임과 프랑스의 개신교 박해를 당시 교회가 겪는 위협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이런 사건들을 적그리스도 세력에 관한 자신의 종말론적 해석과 연결합니다.

이는 18세기 개신교의 정치·종교적 대립 상황을 반영하는 저자의 평가입니다. 독자는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그것을 성경 예언에 적용한 에드워즈의 신학적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의 주된 권면은 외적인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교회의 참된 자유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부흥이 필요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시대에 학문·과학과 철학적 논증이 크게 발전했으면서도 종교적 불신앙과 도덕적 타락이 증가하는 역설을 지적합니다. 기독교를 변호하는 저술이 많아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반드시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의 이성과 문화적 진보는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중생과 거룩함을 스스로 산출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적용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교회의 깊은 침체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인간의 심각한 연약성과 무능함

에드워즈는 사람의 열심과 사역의 기술을 과신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설계한 활동이 영적 열매를 자동적으로 만들어 내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쉽게 극단과 오류에 빠지고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일은 기대한 결과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말씀 선포와 교육, 교회의 질서를 무가치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은혜의 방편을 성실하게 사용하면서도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이러한 의존과 겸손을 표현합니다.

현재의 영적 침체 상태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에드워즈는 교회의 현재가 매우 어두워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붙듭니다. 교회 역사의 큰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자비를 드러내신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회복의 소망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사회가 저절로 나아지리라는 낙관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존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실 분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침체는 기도를 중단할 이유가 아니라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이유입니다.

최근의 사건들은 지금이 구원과 자비의 시대임을 보여 준다

에드워즈는 당시 영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여러 정치·군사적 위기에서 보호받은 사례를 언급합니다. 그는 이러한 일을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해석하면서, 죄가 많은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인내하고 은혜를 베푸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군사적 안전은 잠정적인 외적 유익이지만, 성령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시는 은혜는 훨씬 더 큰 축복입니다. 따라서 그는 외적인 위기에서 구원을 경험한 성도들이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크고 영원한 영적 은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프랑스 대함대를 격파한 두 차례의 승리는 특별한 섭리다

에드워즈는 프랑스의 함대와 관련된 당시의 해전 및 폭풍 피해를 소개하며, 교회가 특별히 금식하고 기도한 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위험이 제거된 사건을 강조합니다. 그는 이를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건져 내신 사례와 비교합니다.

이 사건의 군사적 사실과 신학적 인과 해석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폭풍과 함대의 피해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특정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이라는 결론은 에드워즈 자신의 섭리적 판단입니다. 그는 그것을 통해 더 큰 은혜를 위해 기도할 용기를 북돋우려 합니다.

지금은 배교의 때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자비의 때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심각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시편 119편 126절의 주께서 일하실 때라는 간구를 사용하여 위기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위험에서 백성을 건지셨다면 성도들은 더욱 담대히 성령의 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회복되는 은혜는 다른 모든 일시적 축복보다 더 크며, 기도의 주된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최근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놀라운 영적인 각성

에드워즈는 1732–1733년경 잘츠부르크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며 추방과 재산 상실을 감수했다는 기록을 제시합니다. 1734–1735년 뉴잉글랜드의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에서 일어난 각성, 이후 영국·웨일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와 북아메리카 각지에서 나타난 종교적 변화를 함께 언급합니다.

그는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의 원주민 가운데 복음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 사건과 버지니아·메릴랜드의 영적 각성도 소개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복음의 능력이 널리 나타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강화합니다.

지금의 부흥은 다가올 더 큰 부흥의 전조

에드워즈는 최근의 각성운동 가운데 영적 혼란과 잘못된 열정, 지속되지 못한 열매가 있었다는 비판을 무조건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 문제 때문에 모든 각성을 거짓된 것이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야 앞에 나타난 바람과 지진과 불 다음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있었던 사건을 비유로 들며, 현재의 불완전한 각성이 더 크고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를 예고하는 징조일 수 있다고 소망합니다. 핵심은 현상을 이상화하지 않고 더욱 순수한 성령의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

07기도합주회는 참으로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149–156쪽

교회의 하나 됨은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사회적 관계 가운데 살도록 지음받았으며 공동의 목적을 위한 사랑의 연합이 아름답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순한 인간 사회보다 깊은 연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한 성령과 한 주님을 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 연결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한 몸·한 성령·한 소망·한 믿음을 가르치시는 말씀과 시편 122편의 잘 건설된 예루살렘, 아가서에 묘사된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 그는 교회의 연합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교회의 연합은 특별히 기도하는 일에서 나타나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은 실제적인 신앙적 행동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한 나라와 한 가족의 구성원처럼 공동의 번영과 서로의 유익을 구해야 하며, 특히 교회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에서 연합해야 합니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교회들이 동일한 영적 관심을 나누며 함께 기도한다면 보편 교회의 일치를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추상적인 교회론이 아니라 사랑과 교제가 실제로 표현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기도합주회는 교회에게 너무도 적합한 일이다

에드워즈는 성도가 자기 지역과 개인의 문제만을 위해 기도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교회는 한 몸이므로 다른 지역의 지체가 거룩함과 위로를 누리기를 바라야 하고,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이 구원받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인류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의 본분에 합당합니다. 개인적 이익을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전체를 위해 약속하신 은혜를 구할 때 교회는 더욱 교회다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기도합주회는 많은 유익이 있다

기도합주회는 멀리 떨어진 성도 사이의 사랑과 교제를 깊게 하고 공동의 관심을 강화합니다. 정기적인 합의는 기도를 기억하게 하며, 서로가 같은 제목을 위해 간구한다는 사실은 참여자에게 열심과 용기를 줍니다. 응답의 열매를 발견할 때 함께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교회의 번영을 위한 책임을 새롭게 하고, 평신도에게는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돌아보게 합니다. 특히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제 신앙생활을 점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거룩함을 구하면서 자신의 죄와 무관심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주회에 대한 격려는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은 자신이 풀 수 없는 왕의 꿈에 관한 비밀을 위해 세 친구와 함께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였고, 하나님은 그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에드워즈는 여러 성도가 공동의 필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례로 이 사건을 제시합니다.

에스더 4장에서 유대인들이 멸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에스더는 함께 금식하며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백성을 보호하셨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교회 전체의 위기와 필요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할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기도합주회를 격려하시는 예수님

에드워즈는 마태복음 18장 19절에서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는 기도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인용합니다. 그는 이 말씀을 성도의 거룩한 연합과 교제가 하나님께 귀하다는 근거로 봅니다. 합심기도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한 믿음과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도 하늘과 땅의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하나님의 뜻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한 마음으로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간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목적과도 연결된 아름다운 실천입니다.

제3부기도합주회를 반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4개 장
01기도합주회는 인위적인 방법론이라는 반론에 답함159–165쪽

반론: 기도합주회는 인위적인 규례를 만들어 사람들의 양심을 속박하고 미신으로 흐르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반대자들은 성경이 명령하지 않은 요일과 시간을 구별하여 기도를 정례화하는 일이 인간이 예배에 새로운 종교적 규례를 추가하는 행위일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개신교는 인간이 만든 절기를 신적 명령처럼 강요하고 성도의 양심을 얽어매는 일을 반대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기도운동이라도 특정한 일정을 지키는 일이 경건의 기준으로 변질되거나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비난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성경의 명령과 인간이 정한 편의 사이의 경계입니다.

답변: 기도합주회의 제안 내용은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만들어졌다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계획에 특별한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절대적 의무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려 하지 않았고, 다른 교회의 제안과 수정 의견을 받으며 시간과 방법을 조정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특정한 날이 더 거룩하거나 하나님께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와 가까워 성도들이 기도에 집중하기 쉽다는 현실적 이유로 시간을 정했습니다. 따라서 기도합주회는 새 절기를 제정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성경이 명령한 기도를 실천하기 위한 자발적 합의입니다.

답변: 구체적인 사항들을 협의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공동 예배를 명령하지만 구체적인 시간, 장소, 예배 순서의 모든 세부를 고정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예배하려면 교회는 어디에서 언제 모일지, 어떤 순서로 기도와 찬송과 성경봉독과 설교를 진행할지 협의해야 합니다. 그러한 결정 자체가 인간적 미신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결정에 성경의 명령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고 다른 방식을 정죄하는 태도입니다. 여러 교회가 월별 모임이나 특별 금식일에 합의하는 것도 정당할 수 있지만 그 날짜를 신성불가침의 규정으로 만들면 양심을 구속하는 잘못이 됩니다. 에드워즈는 기도합주회도 이 구별 아래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02기도합주회를 하면 능력이 더 있는 것이냐라는 반론에 답함166–179쪽

반론: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이 동시에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왠지 꺼림칙하다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기도하면 다른 시간에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보다 더 강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외적인 동시성을 응답의 조건으로 만들 근거는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문제의식을 인정하지만 기도합주회의 목적을 오해한 것이라고 답합니다. 제안자들은 같은 시간에 기도한다는 형식이 하나님께 어떤 신비적 효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시간 합의가 성도들의 연합과 지속적인 기도 생활에 실제적으로 유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답변: 기도합주회는 성도의 연합의 가시화이기도 하다

성도들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일정한 시간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약속하면 교회의 이미 주어진 연합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일정이 없으면 특별 기도의 중요성에 동의하면서도 그 일을 쉽게 미루거나 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서로가 참여하고 있음을 알고 정해진 시간을 기억하면 더 오래 기도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유익은 하나님의 능력을 조작하는 일이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의 경건을 돕는 일입니다.

답변: 특별한 시간을 약속하는 것은 연합을 위한 적절한 전략이다

같은 지역의 성도들은 예배를 위해 시간과 장소를 함께 정함으로써 실제로 모입니다. 그러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은 동일한 장소에 모일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들이 장소의 일치 없이도 시간을 맞추어 공동의 예배와 기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국가적인 금식이나 감사의 날이 정해지면 여러 교회가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서도 같은 날 예배합니다. 이처럼 시간에 관한 협의는 성도의 일치를 나타내는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지리적 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 소망을 실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답변: 기도 시간 약속을 반대하는 것은 기도에 대한 동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

에드워즈는 세계 여러 지역의 성도들이 실제로 연합해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누군가는 먼저 제안하고 다른 사람들이 명시적으로 동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참여의 일정과 방식이 전혀 알려지지 않으면 다른 교회의 기도를 기억하거나 함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간표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합이라는 목적에는 실제적인 표현과 협의가 필요하며, 아무 대안 없이 그러한 합의 자체를 거부한다면 기도 연합을 실행하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답변: 기도합주회는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 특별한 직접적 효력을 발휘한다고 보는 관점을 명확히 배척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강한 격려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는 예배에 참여하는 시각장애인이 함께 예배하는 다른 이들을 볼 수 없어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인식으로 위로를 얻는 사례를 듭니다. 다른 사람을 직접 보는 것이 성도의 연합을 느끼는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먼 나라의 성도들이 바로 지금 함께 기도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교제의 기쁨과 기도의 활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답변: 사람은 본성적으로 현재의 일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마음은 과거 또는 미래의 사건보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더 강렬하게 반응하기 쉽습니다. 에드워즈는 멀리 있는 자녀가 지금 고통받는다는 것을 아는 부모와, 친구가 지금 자신을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을 예로 듭니다.

현재의 사건이 객관적으로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시간적 경험은 현재의 일을 특별히 생생하게 느끼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성도들이 바로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이 특별한 격려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비합리적이거나 미신적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답변: 현재 일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모든 창조된 지적 존재의 공통점

에드워즈는 현재의 사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이 단지 타락한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결함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천사들이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사용하여, 새롭게 일어나는 선한 일에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 거룩한 존재에게도 자연스럽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함께 기도하는 성도가 현시점의 공동 행동에서 더욱 큰 위로를 얻는 것은 잘못된 감정이 아닙니다. 다만 이 감정적 격려를 기도 자체에 신비한 힘을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답변: 특별 기도의 시간을 약속하는 것은 성도의 교제의 좋은 방편이다

에드워즈는 영국 정기간행물 The Spectator에 나온,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친구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며 우정을 유지했다는 사례를 언급합니다. 친구가 지금 같은 시간에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거리를 뛰어넘는 교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우정에도 합당한 방법이라면, 한 아버지를 섬기고 한 구주 안에 속한 세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나라와 공동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약속하는 것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기도합주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마술적인 절차가 아니라 성도의 교제를 돕는 실천적인 방편입니다.

03기도합주회는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와 비슷해 보인다는 반론에 답함180–183쪽

반론: 기도합주회는 의도적으로 세상에 보이기 위한 바리새인적인 것이 아닌가?

반대자들은 기도합주회의 참여 사실을 여러 지역에 알리고 외적인 연합을 드러내는 일이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려는 바리새적 행동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특정 기도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경건한 집단으로 구별하면 영적 우월감이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반론은 공개적인 기도 자체보다 행동의 동기와 참여자들이 다른 성도들과 구별되고자 하는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우려를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공개성 자체를 곧 외식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답합니다.

답변: 특별한 종교 의식에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것 자체가 바리새적인 것은 아니다

여러 교회가 특별한 금식일이나 감사의 예배를 위해 같은 날 모이기로 약속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시행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합의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만 그 자체로 바리새적 외식은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는 모든 사람을 외식자라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행동이 드러나는지 자체보다 그 목적에 있습니다. 사람에게 칭찬받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경건을 과시하려 한다면 잘못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공동체를 돕기 위해 참여 사실을 알리는 것은 합당할 수 있습니다.

답변: 사람을 구별하려는 게 아니라 참여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이 소수의 특별한 기도 집단을 만들려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참여하기를 바랐다고 강조합니다. 초기에는 참여자들이 드물어 눈에 띄었을 수 있지만 운동이 널리 확산되면 그 특별한 구별도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제안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명성을 높이려 하지 않았고 교단과 교회 정치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경건과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기도합주회의 방향은 종교적 우월감에 의한 배제가 아니라 연합의 확대입니다.

04기도합주회 청원서의 내용이 새롭고 생소한 일이라는 반론에 답함184–190쪽

반론: 기도합주회 제안은 새롭고 생소한 일이다

네 번째 반론은 여러 나라의 성도들이 시간을 정해 공동의 기도 제목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교회의 관례에 없었던 새로운 제도라는 주장입니다. 새로운 종교적 형식을 도입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며 성경이 명령하지 않은 제도를 교회에 추가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배경에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특정한 방법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새롭다는 사실만으로 그 방법이 잘못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의무와 실천의 적법성입니다.

답변: 성도의 기도 본분은 새삼스러운 의무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교회의 회복을 구하는 기도는 성경이 이미 명령한 의무입니다. 성도들이 이전보다 자주, 더 간절히 기도하기로 새롭게 결심한다면 그것은 새 교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게으름을 버리고 본래의 의무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여러 지역의 성도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는 것도 교회의 생활에서 낯선 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기도를 실제로 시행하기 위해 합리적인 방법에 동의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며, 그것을 곧 신적 규례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답변: 기도합주회 제안은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에드워즈는 1712년 런던에서 시작되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전달된 연합기도 청원을 긴 분량으로 소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치적 위기와 종교적 갈등 가운데 매주 화요일 오전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을 구별하여 개인적으로 기도하기로 제안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시간에 한 시간을 드려도 되었습니다.

기도 제목에는 교회의 평화와 참된 신앙의 보호, 개신교 왕위 계승, 국가의 안전과 다음 세대의 영적 유익이 포함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후 앤 여왕의 사망과 조지 1세의 왕위 계승을 이 기도에 대한 섭리적 응답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1732년과 1735년에도 비슷한 제안이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1740년대의 기도합주회는 이전에 없던 발명이 아니라 연합기도의 역사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맺음말맺음말1개 장
결론맺음말191–202쪽

독자들은 이제 기도합주회에 동참할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라

에드워즈는 장대한 성경적 논증과 반론에 대한 답변을 마친 뒤 독자들에게 실제 참여를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권합니다.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은 금이나 은, 세상적인 대가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중요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회복을 위해 함께 간구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스가랴 8장의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권면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제안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성경이 이미 가르친 기도의 의무에 자신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합주회를 제안한 스코틀랜드의 목회자들은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에드워즈는 제안자들이 분리주의 집단을 조직하거나 새 교파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회자들이며 교회의 분열을 안타까워하고 평화와 참된 경건을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청원서에 개인의 명성을 부각하지 않고 익명으로 남았다는 사실, 제안의 운영 방식을 수정할 수 있도록 열어 둔 점, 양심을 보호하기 위해 신중한 규정을 마련한 점을 그들의 겸손과 진실성의 증거로 봅니다. 당대의 잘못된 열정주의가 우려되더라도 오히려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간절히 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도합주회의 소식을 크게 기뻐한다

에드워즈는 교회의 회복을 진심으로 소망하는 성도라면 여러 나라의 형제자매가 함께 기도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기쁘게 들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시온의 돌과 티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교회의 미래를 위한 기도는 그 자체로 위로와 소망의 징조입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귀환할 가능성과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는 모습을 예로 듭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침체된 교회가 회복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다른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서 큰 격려를 얻게 됩니다.

최대한 연합하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기도하자

에드워즈는 참여를 결단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기도를 미루지 말라고 권합니다. 가능한 사람들과 시간을 협의하여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멀리 있는 성도들과 같은 목적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매 분기 특별한 기도의 날을 정하는 방법도 유익하지만 특정한 형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해서 기도를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나 평신도 모두 힘을 합하여 기도하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는 목회자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공동의 유익과 영적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가정과 이웃, 지역 교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참여를 권면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목회자가 교회를 돌보는 직무와 다른 교회와의 교류 기회를 통해 특별히 이 기도를 확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평신도 역시 실제적인 사랑과 교제의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므로 모두가 자신의 기회와 책임을 따라 협력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쉬지 말고 기도하자

에드워즈는 신속하게 기도를 시작하는 일과 오랫동안 인내하며 계속하는 일을 함께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몇 년 동안 기도했는데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거나 상황이 더욱 어두워진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1746년 11월부터 7년간 지속하려는 기도합주회가 그 기간에 끝나지 않고 더 깊고 넓은 운동으로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를 인간이 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박국 2장의 정한 때를 기다리라는 권면과 미가 7장의 기다림처럼,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