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잡힌 부흥론』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 전체 요약본 PDF 다운로드조나단 에드워즈는 누구인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18세기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 활동한 회중교회 목회자이자 개혁주의 신학자·철학자이며, 제1차 대각성운동의 대표적인 해석자입니다. 코네티컷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에서 목회하면서 1734–1735년 지역 부흥과 1740년대 대각성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는 부흥의 열매를 적극 옹호하면서도 성령의 인도라는 이름으로 주장되는 사적 계시, 사람의 회심 여부에 대한 성급한 판정, 목회 질서의 파괴와 같은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이후 스톡브리지에서 목회와 북미 원주민 선교 사역을 감당했으며, 1758년 뉴저지대학(오늘날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직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죄인의 무능력,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의 회심시키시는 역사와 거룩한 삶의 열매를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 『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 『원죄론』(Original Sin) 등은 그의 중요한 저술입니다. 이 책 『균형잡힌 부흥론』의 영어 원제는 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로, 1742년의 논쟁을 배경으로 집필되어 1743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부흥을 반대하거나 무조건 칭송하는 두 태도 사이에서, 성경과 실제적인 신앙의 열매를 근거로 부흥을 분별하고 더욱 건강하게 증진하는 방법을 논증합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저작이지만, 신대륙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 등 일부 해석은 저자 당시의 시대적 전망으로 읽어야 합니다.
[책 소개]
1740년대 뉴잉글랜드에 제1차 대각성운동이 확산되자 수많은 사람이 죄를 깨닫고 회심했지만, 격렬한 감정과 신체적 반응, 일부 설교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둘러싸고 논쟁도 깊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부흥 전체를 광신적인 열정으로 몰아 부정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령의 역사라는 이유로 모든 체험과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양쪽을 성경에 비추어 검토하며, 부흥의 실제 성격과 올바른 반응을 밝히기 위해 집필한 저술입니다.
에드워즈는 참된 부흥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종교적 흥분이 아니라 성령께서 죄인을 회심시키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부흥의 방법이나 외적 현상만으로 그 진위를 단정하지 말고, 복음의 진리와 거룩한 사랑, 회개와 지속적인 순종의 열매를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동시에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냉담함과 영적 교만·사적 계시·무질서에 빠지는 광신주의를 함께 경계하며, 말씀과 설교, 기도와 금식, 성례, 교회의 연합, 자선과 구제 등 하나님께서 주신 수단으로 부흥을 분별하고 증진해야 한다고 논증합니다.
요약 목차 펼치기 / 접기
- 부 제1부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다
- 부 제2부 부흥을 반대하거나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찬성하고 추구하라
- 부 제3부 부흥에 대한 열 가지 부당한 비난에 대한 답변
- 1. 청중의 지성보다 감정에 호소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2. 위로가 아니라 두려움을 준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3. 어린이에게 지옥 불 이야기를 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4. 신앙적인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5. 설교를 너무 자주 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6. 신체적 현상을 너무 많이 일으킨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7. 다른 사람을 보고 따라 하도록 방치했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8.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9. 모임시 찬양을 너무 많이 부른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10. 어린이들이 성경 읽고 기도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 부 제4부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피해야 할 일들
- 부 제5부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
- 전체 핵심 논지
부제1부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다
1.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사용한 잘못된 분별 기준 세 가지
한국어판 57–108쪽
사후 판단하지 않고, 사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부흥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첫 번째 오류가 부흥의 실제 결과를 검토하기 전에 부흥이 시작된 방식과 사용된 도구만을 보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를 평가하는 규범이며, 부흥의 본질은 사람의 마음에 실제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방법이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거나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사용하신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역사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행하심에 대해 먼저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예상과 다르게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사용하시며, 그들의 부족함 가운데서도 자신의 주권과 충족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지혜가 높이 평가하는 질서나 명성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따르시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뛰어난 지위와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젊거나 덜 알려진 설교자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실 수 있으며, 사역자의 연약함까지도 인간의 교만을 낮추는 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역자가 저지른 잘못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수단의 외적 인상과 그 수단을 통해 일어난 실제적인 구원의 열매를 구별하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는 일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사후 판단은 결과가 좋아 보이기만 하면 모든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결과가 실제로 말씀에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 기대 밖의 사람과 사건을 사용하실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뒤의 제4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흠 있는 도구를 쓰셨다는 사실과 그 도구의 잘못이 허용된다는 결론을 에드워즈는 결코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성경 대신 다른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에드워즈가 지적하는 두 번째 오류는 성경 이외의 기준으로 부흥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받아들인 철학과 심리학, 이전의 역사와 경험, 자신의 체험적 한계까지 성경 못지않은 판단 기준으로 삼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참된 신앙은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강력한 신앙 감정을 경솔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순간적인 격정이나 육체적 흥분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때 생기는 거룩하고 견실한 신앙 감정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무감각한 추상적 기능이 아니며, 무엇을 사랑하고 싫어하며 추구하는 마음의 성향은 신앙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더욱 분명히 알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도 강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의 성도들은 참된 사랑과 기쁨이 식어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한 감정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강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거짓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감정의 강도 자체가 구원의 증거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 감정이 무엇에서 시작되었고, 어떤 진리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얼마나 견실한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는 특별한 신체적 반응도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거룩한 대상에 대한 강력한 깨달음이 연약한 인간의 몸에 영향을 주어 떨림이나 울음, 힘이 빠지는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계시이지 모든 신체 반응의 생리학적 원인을 분류하는 의학책이 아니므로, 어떤 현상을 성경이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적 현상 역시 그 자체로 은혜의 참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에드워즈는 이전의 교회사나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척도로 삼는 태도를 반대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셨다고 해서 이후에도 정확히 같은 형태만 사용하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역사적 전기와 신앙인의 기록을 인용하여 특별한 영적 감정과 신체적 반응이 전혀 유례없는 일이 아님을 보여 주지만, 궁극적인 판단의 기준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성경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자신이 어떤 깊은 죄의 깨달음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체험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무책임합니다. 부흥을 논하는 사람은 자신의 제한된 경험보다 성경이 설명하는 거듭남과 믿음의 본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에드워즈의 논증에서 중요한 대목은 지성과 감정을 서로 독립된 두 영역으로 놓고, 감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앙의 실재성을 깎아내리는 당시의 철학적 전제를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혼이 어떤 대상을 추구하거나 배척하는 의지의 작용이 그 대상을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의 성향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진리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인식하면서도 마음과 의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참된 신앙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열정이 거룩한 감정은 아닙니다. 몸의 기질과 충동에서 주로 비롯되는 일시적인 격정, 지속적인 지식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감정,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흥분을 구별해야 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강도로 그 차이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역사적 전례를 사용하여 비범한 영적 체험이 뉴잉글랜드에만 처음 나타난 기이한 현상이 아니었다고도 논증합니다. 그는 『성경의 성취』에 실린 영국 랭커셔의 캐서린 브레터 부인의 체험, 에든버러의 설교 모임과 영국의 존 로저스가 설교할 때 청중이 크게 부르짖었다는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존 플라벨이 기록한 한 신앙인의 깊은 위로와 황홀경, 프린스 목사가 출판한 클랩 대령의 회상, 디어필드의 윌리엄스 목사가 보고한 회중의 각성 사례도 제시합니다. 브레터 부인은 죄와 죽음에 대한 커다란 고뇌 뒤에 그리스도 안의 기쁨을 표현했고, 플라벨의 사례는 여행 중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묵상하다 강렬한 영적 위로와 신체적 탈진을 경험한 경우였습니다. 클랩 대령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으로 큰 소리로 외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에드워즈는 이런 사례들이 곧바로 체험의 참됨을 증명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유사한 외적 현상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현재의 부흥을 반대하는 주장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보여 주며, 끝내 판단의 최종 기준을 성경과 지속적인 경건의 열매에 둡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 번째 오류는 부흥에 나타난 부작용과 잘못된 행동을 근거로 부흥 전체를 거짓된 것으로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에드워즈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도 인간의 죄와 무지, 타고난 기질과 상상력, 잘못된 판단과 사탄의 미혹이 뒤섞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사람이 참된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일부 행동에서는 심각한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부흥에 동참한 다른 사람들이 그 실수를 모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흥의 일부에서 악한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과 전체 부흥의 근원이 악하다는 결론 사이에는 논리적 간격이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비유와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역사에 인간의 결함이 동반되는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논증합니다. 언약궤를 옮기던 이스라엘 백성의 사건은 좋은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맞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면 심각한 결과가 따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잘못을 허용하신 것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겸손을 가르치는 섭리적 방편일 수 있습니다. 악한 것과 선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부의 허물 때문에 진실한 회심과 거룩한 변화까지 배척하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입장은 오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엄격히 바로잡되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역사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에드워즈는 영적 각성의 외적 변화에 참된 회심과 인간적인 모방, 일시적인 감정과 지속적인 성화가 뒤섞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부흥의 부분적인 오류를 모두 부정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흥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현상을 즉시 승인하는 사람도 경계합니다. 설교자와 회중에게 실제로 나타나는 은혜의 열매를 확인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수단과 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두 명제가 함께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는 언약궤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 큰 해를 입은 다윗의 사례를, 선한 목적을 위하여 시작한 일에도 잘못된 방법이 혼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논거로 활용합니다. 그러나 실패 이후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에 맞추어 다시 행동했고 마침내 온 백성이 기뻐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합니다. 따라서 바른 반응은 오류를 은폐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통째로 버리는 두 극단 중 하나가 아니라, 잘못된 방법을 바로잡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열매를 계속 추구하는 것입니다.
2.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다
한국어판 109–144쪽
부흥 체험의 일반적인 특징
에드워즈는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나타난 광범위한 변화를 근거로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이전에는 영원한 생명과 자신의 구원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죄와 심판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특별히 젊은이들 가운데 세속적 유흥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말씀과 예배, 기도와 경건한 교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단순히 일시적인 공포나 유행의 확산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에드워즈는 판단합니다.
부흥의 효과는 외적인 생활의 개선을 넘어 내적인 죄의 인식으로 이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완고함과 무지, 자기 의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을 깊이 깨달았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음을 인식했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의의 충족성,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의 약속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갈망하는 변화도 나타났습니다. 이미 경건한 성도로 알려졌던 사람들 역시 회개와 사랑, 기쁨과 자기 부인에 새로운 활력을 얻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변화가 여러 달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지속된 사례들에 주목합니다. 그는 극적인 눈물이나 몸의 반응보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다른 사람과 화해하고, 거룩한 생활을 계속하려는 성향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모든 경험이 완전하고 순수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 신앙적 각성과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모두 착각이나 사탄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합니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증거에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바뀌었다는 사실도 포함됩니다. 이전에 오락과 명예, 재물에 몰두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구원의 필요를 숙고하고,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데서 돌아서 그리스도의 의와 속죄를 더욱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는 특히 오래된 원한이 풀리고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사례, 이미 경건하다고 인정받던 성도들이 새로운 회개와 자기 성찰에 이르는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부흥을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뒤에 나타나는 삶의 전환으로 이해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드워즈의 부인 사라가 체험한 특징
에드워즈는 자신이 가까이 알고 있는 한 사람의 특별한 영적 체험을 길게 소개합니다. 한국어판은 이 인물을 그의 부인 사라 에드워즈로 설명하지만, 본문 자체에서는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는다는 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 인물이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과 그리스도의 사랑, 하늘에 속한 거룩함을 매우 깊이 인식하고 지속적인 평안과 기쁨을 누렸다고 증언합니다. 또한 자신이 가진 우울함이나 인간적인 연약함에 사로잡히기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를 더욱 평안하게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이 체험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비범한 강도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고 자신을 낮추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 온유하게 대하려는 성향을 보였습니다. 또한 교회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 세계에 확장되기를 진심으로 갈망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런 체험이 광신주의나 정신적인 혼란이라면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처럼 겸손하고 사랑이 풍성한 상태를 경험하기를 바란다고 풍자적으로 말합니다. 그가 이 사례를 소개한 목적은 특별한 신체 반응을 부흥의 기준으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동반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거룩한 열매가 참되게 나타날 수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흥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부흥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특별히 영광스러운 사건이라고 평가합니다. 첫째, 그 본질이 죄인을 회심시키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구속적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심과 각성의 정도가 강력하고 그 영향이 여러 지역으로 퍼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많은 사람이 복음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가지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특별한 기쁨과 위로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러한 영광이 설교자나 특정한 운동의 명예가 아니라 성령께 속한다고 강조합니다. 부흥의 외적 현상을 과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할 필요도 없고, 일부 오류를 들어 성령의 참된 역사를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의 실질적인 변화와 거룩한 열매를 성경적으로 판단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영광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들이 놀랄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이 전하는 화목과 중생,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한층 넓고 강력하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역사가 범위와 수, 깊이에서 두드러진다고 설명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참으로 회심했다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집단적 각성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개별 인물의 최종적인 구원 상태를 확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부제2부 부흥을 반대하거나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찬성하고 추구하라
1. 부흥에 대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한국어판 147–155쪽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참된 구원 역사가 분명하게 나타날 때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중립적인 관찰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싸우시며 그리스도는 그 교회의 왕이자 구원의 대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고 기뻐하며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돕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태도가 엄중하게 책망받는 사례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의 논증은 모든 종교적 열정에 즉각 동의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앞서 성경에 따라 확인한 참된 부흥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부흥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설교자나 지역의 신앙운동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회심과 성도의 갱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거룩함을 자신의 관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명백하게 하나님의 역사로 판단한 뒤에도 그것을 외면한다면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때 인간의 명예나 정치적·교회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말씀의 증거와 은혜의 열매를 먼저 살피라고 촉구합니다.
에드워즈는 이를 전쟁 중인 왕에게 소속된 병사가 왕의 출전을 바라보면서도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고 말하는 상황에 비유합니다. 왕이 전진하고 부름을 내릴 때 그 군대의 일원이 손을 거두는 행동은 중립이 아니라 왕의 뜻을 경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 대장에 관한 본문과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한 성경의 이미지를 연결합니다. 물론 이런 논증이 성립하려면 먼저 그 현상이 하나님의 역사인지 성경적으로 분별했다는 제1부의 전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2. 종말이 미국에서 동트기 시작했다
한국어판 156–165쪽
에드워즈는 당대 뉴잉글랜드 부흥을 더 넓은 구속사적·종말론적 전망 속에 놓습니다. 그는 성경의 여러 예언을 검토하면서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계적으로 영광스럽게 확장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신대륙에서 일어나고 있을 가능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신대륙이 개척되어 기독교가 새롭게 정착한 역사적 정황과 부흥의 확산, 예언에 나타나는 열방의 회복과 성령의 부으심을 함께 고찰합니다. 이는 그가 뉴잉글랜드 부흥을 단순한 지역적 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진 역사로 이해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드워즈는 이사야의 예언과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장차 온 땅에 퍼질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본문을 자신의 전망에 연결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성경 해석에는 특정 시대와 지역에 대한 추론이 포함되므로, 이를 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된 사실처럼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요약의 정확한 표현은 그가 뉴잉글랜드 부흥이 장차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대를 여는 징조이거나 여명일 가능성을 강하게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 기대의 신학적인 중심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번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와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온 세계에 퍼지는 데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더 구체적인 논거는 이사야 60장 9절의 멀리 떨어진 섬들과 다시스의 배가 먼저 온다는 이미지입니다. 에드워즈는 기존 교회가 자리 잡은 세계와 바다로 격리되어 있는 먼 곳이라는 묘사가 자신이 이해한 신대륙의 위치와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시작된 초기 복음 전파와 구별되는 장래의 영광스러운 교회 확장이라는 독법을 제안하며, 그 첫 열매가 아메리카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추론합니다. 아울러 종교개혁 전후에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이 알려진 역사적 시기, 구대륙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신대륙이 복음을 받은 뒤 도리어 구대륙에 전해 줄 수 있다는 역전의 구도를 하나님의 섭리적 상응 관계로 설명합니다.
이 논증에는 레아와 라헬, 요셉과 베냐민의 관계에 대한 유형론적 비유, 다윗이 피를 흘렸기에 성전 건축의 영예가 솔로몬에게 돌아갔다는 구약의 유비, 광야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이미지가 동원됩니다. 에드워즈는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퍼지는 생명의 강을 성령의 확산과 결부하며 세계적인 부흥의 시작과 방향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 본문이 직접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목한다는 사실의 보고가 아닙니다. 본문의 지리적 상징과 자신이 알고 있던 식민지 시대의 역사·지리 정보를 결합한 그의 종말론적 가설입니다. 오늘날에는 당시 북미 원주민 사회에 대한 그의 제한적인 역사 인식과 유럽 중심적인 지리 관념도 함께 고려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의 견해를 충실히 전달하는 것과 그 해석의 역사적 타당성을 승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3. 부흥을 반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어판 166–186쪽
에드워즈는 참된 부흥을 반대하는 태도가 단순한 견해 차이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일이 성경에서 엄중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집단들과 메로스의 소극성, 언약궤 앞에서 기뻐하는 다윗을 멸시한 미갈,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불신한 사마리아의 장관 등 여러 사건을 인용합니다. 이 사례들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합니다.
그의 경고를 이해할 때에는 특별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에드워즈는 자신과 다른 판단을 가진 모든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 여부를 단정할 권한이 인간에게 없다고 제4부에서 분명히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장의 논지는 반대자 개인을 정죄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부흥이 성경에 비추어 참된 성령의 역사로 확인된다면 그것을 경솔하게 비난하거나 방해하지 말라는 엄중한 권면입니다. 반대할 만한 실제적인 오류가 있다면 그 오류는 지적하고 교정해야 하지만, 오류를 이유로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에드워즈는 특히 성경의 여러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들의 결말을 길게 살핍니다. 기드온에게 양식과 협력을 거절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한 것을 멸시한 미갈,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못했던 사마리아의 장관 등을 들어 불신과 조롱의 위험을 설명합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당시 부흥의 반대자와 완전히 동일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의 역사에서 추출한 유비를 현재에 적용하고 있으며, 요약에서도 그 유비와 직접적인 동일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제2부의 강한 경고와 제4부의 회심 여부 판정 금지는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해치고 있다고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가 택함을 받지 않았거나 장차 결코 회개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정하는 일은 인간에게 맡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에드워즈가 부흥의 참됨을 옹호할 때조차 목회자의 최종 심판권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4.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한국어판 187–215쪽
공직자들의 의무
에드워즈는 사회적으로 공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는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지도자들이 먼저 나섰던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공직자는 자신이 가진 명예와 위치를 이유로 신앙적인 관심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말고, 가능한 범위에서 참된 경건과 교회의 유익을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합니다. 이 권면에는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정치·종교 관계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구체적인 공권력의 역할까지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별도의 검토가 필요합니다. 다만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원칙은 사회적 영향력이 클수록 그 권한을 자신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논증은 공직자가 단순히 부흥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요청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궤를 옮기거나 성벽을 재건할 때 장로와 지도자들이 앞장서 참여한 일을 근거로, 사회에서 책임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데 쓰지 말고 백성의 경건을 격려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그는 지도층의 무관심이 일반 사람들에게 신앙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모든 종교적 활동에 무제한으로 권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일반 원칙을 정립한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들의 의무
에드워즈는 부흥을 위해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특별히 엄중하게 다룹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영혼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성령의 역사를 가장 먼저 분별하고 지지해야 하며, 회심과 성화의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맺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는 구약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솔선수범했던 사례를 제시합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역사를 냉담하게 대하거나 자신보다 하나님께 더 크게 쓰임받는 설교자를 시기한다면, 그의 직무는 부흥의 유익이 아니라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식이 자신의 선호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젊고 덜 알려진 설교자를 통해 많은 회심이 나타났다면 그 열매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반대로 부흥에 동반된 광신주의와 무질서를 실제적인 목회적 책임을 가지고 교정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의무는 부흥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충실한 가르침과 자신의 경건한 삶을 통해 참된 은혜를 보존하고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설명할 때 에드워즈는 느헤미야가 백성을 조직하여 성벽을 세운 일을 자주 떠올립니다. 성벽을 세우면서도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 경계한 모습처럼, 목사는 회심과 성화를 위해 말씀을 부지런히 전하는 동시에 부흥에 침투할 수 있는 거짓 가르침과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사역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섭리를 불평해서는 안 되며, 다른 목회자의 유익한 사역을 시기하는 태도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지도자의 임무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진리를 듣고 은혜의 열매를 맺도록 협력하는 데 있습니다.
성도들의 의무
에드워즈는 목회자나 공직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부흥에 참여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지 살피며, 가능한 모든 정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구원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회심하고 거룩한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볼 때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특별한 권위나 학식이 없는 사람도 기도와 개인적인 권면, 이웃 사랑과 선행을 통해 부흥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권면의 중심에는 부흥을 일부 뛰어난 사역자들의 운동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일에 응답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느헤미야 8장에서 율법을 들은 백성이 말씀을 이해하고 기뻐하며 서로 먹을 것을 나누었던 모습을 부흥의 적절한 반응과 연결합니다. 은혜의 역사는 어떤 뛰어난 설교자나 특정한 직책의 사람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며, 평범한 성도도 기도와 화해, 선행과 경건한 생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모두 호명하여 서로의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에게 부흥에 동참하는 일은 단순한 정서적 지지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제적인 순종입니다.
부제3부 부흥에 대한 열 가지 부당한 비난에 대한 답변
1. 청중의 지성보다 감정에 호소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16–223쪽
에드워즈는 설교가 사람의 이해력만을 만족시키고 마음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두려움과 기쁨에 실제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과 영원한 구원이 걸린 문제를 설명하면서 설교자가 전혀 감동받지 않거나 청중이 진리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도록 말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교는 거짓된 이야기나 과장으로 감정을 조작해서는 안 되지만, 참된 진리를 더욱 분명하고 힘 있게 제시하여 그 진리가 합당한 감정을 일으키도록 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성경과 사도들의 설교에서 진지하고 뜨거운 권면의 모범을 발견하며, 내용의 진리성과 감정의 강렬함을 대립시키는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에드워즈는 설교가 교리와 논증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먼저 인정합니다. 그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과 과장된 몸짓으로 청중을 흥분시키는 설교를 이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다만 설교의 목적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죄인을 회개시키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에, 지성적인 이해와 마음의 변화는 함께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의 반박은 '생각 없이 감정을 끌어올려도 된다'는 허용이 아니라 '참된 진리에 대한 합당한 감정도 설교의 정당한 목표다'라는 주장입니다.
그는 선지자들이 큰 목소리와 몸짓으로 사람들에게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례도 인용합니다. 이사야 58장 1절의 외침과 에스겔 6장 11절의 강한 표현은 성경의 진리를 전할 때 진지한 정서적 열심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외적인 발성이나 몸짓만을 모방한다고 해서 진리를 전달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교리를 설명하는 일과 그 교리에 합당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은 상호 보완적이며, 청중에게 어떤 종류의 사랑과 경외를 요청하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설교의 본질에 속합니다.
2. 위로가 아니라 두려움을 준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24–232쪽
에드워즈는 죄인에게 자기의 위험한 상태를 분명히 알려 주는 일이 참된 사랑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반박합니다. 만일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면 그 위험을 깨닫는 두려움은 반드시 잘못된 감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없는 위험을 만들어 내거나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인이 자신의 처지를 잘못 이해하여 느끼는 거짓된 평안을 지켜 주기 위해 심판의 진리를 감추는 것도 바른 목회가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말하는 죄와 심판, 구원의 긴급성을 정직하게 전하는 일이 사람을 절망으로 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깨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사람이 자신의 죄와 위험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 때때로 큰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에서 곧바로 확신과 위로로 건너뛰도록 돕는 것이 반드시 참된 사랑은 아닙니다. 잘못된 확신을 주지 않고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정직하게 설명하면서,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의 주장은 두려움의 강도를 무조건 최대화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위험을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게 할 만큼 축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중요한 목회적 예외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에드워즈는 심한 우울에 빠져 진리를 비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일반적인 각성 설교를 개인에게 곧바로 적용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런 사람에게 진리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때때로 잘못된 해석과 심리적 혼란을 자극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를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을 더 강하게 주어야 한다는 일률적인 권고로 바꾸면 안 됩니다. 심판의 진실성을 감추지 않는 것과 고통 중인 개인에게 어떤 말과 방식이 적절한지 분별하는 것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3. 어린이에게 지옥 불 이야기를 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33–234쪽
에드워즈는 어린이도 아담 안에서 죄인이며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므로, 그들에게 죄와 심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말씀 중 일부를 원칙적으로 감추어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논지는 거짓된 공포를 만들어 내거나 잔인하게 어린이를 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진리를 정직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오늘날의 교육적 적용에서는 본문의 정확성을 지키면서 아동의 발달 수준과 심리적 안전, 복음의 소망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실제 표현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는 어린아이를 성인보다 본성적으로 무죄한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보며, 원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인간의 상태를 연령과 무관하게 적용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그의 주장을 단지 아동의 발달 단계에 맞춘 종교 교육으로 환원하는 것은 원문의 논쟁적인 성격을 약화시킵니다. 오늘날 어린이에게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는 별도의 목회적·교육적 판단이 필요하지만, 그 문제와 18세기 에드워즈가 논증한 죄와 심판에 관한 교리적 주장은 구별하여 제시해야 합니다.
4. 신앙적인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35–239쪽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유흥과 술집 출입, 무익한 이야기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기도와 성경 읽기, 설교와 영적 교제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고 비판하는 태도가 일관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문제가 참으로 중요하다면 그 일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그는 신앙에 대한 관심이 일상적인 책임을 무조건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지만, 세상적인 관심보다 종교적인 관심이 더 크다는 사실 자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기준을 거부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활동에 사용한 시간의 절대량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과 합당한 삶의 책임 속에서 수행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활동에도 '너무 많은 것'이 존재할 수 있으며, 당시 성도들이 외적인 경건 활동에 비해 이웃에 대한 도덕적 의무에는 충분히 힘쓰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그의 논증을 모든 시간과 가족·직업의 의무를 희생하여 계속 집회에 참여하라는 권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세상적인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영혼과 영원한 구원에 관한 일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제3부와 제5부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은 종교적인 모임의 횟수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과 순종을 함께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경제적인 비용과 시간 손실이라는 반론에도 답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무익한 유흥과 낭비에 사용하던 시간을 줄이고 절제 있는 생활로 돌아온 결과, 종교적 모임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했어도 사회 전체로는 오히려 시간과 재물을 절약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일을 낭비라고 비난한 유다의 태도를 예로 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세속적인 효율만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가 동시에 가정과 직업에 대한 책임,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실제적인 선행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5. 설교를 너무 자주 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40–242쪽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말씀을 갈망하는 시기에 설교의 기회가 증가하는 것을 곧바로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성경이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며, 특별한 영적인 필요가 있다면 평소보다 많은 설교와 권면이 유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의 횟수를 증가시키는 일 자체가 부흥의 참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에 충실해야 하고 청중의 실제적인 유익을 고려해야 합니다. 에드워즈가 반대하는 것은 설교가 빈번하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성령의 역사를 정죄하려는 태도입니다.
에드워즈는 설교를 많이 들으면 앞서 들은 설교의 내용을 잊어버린다는 반론도 검토합니다. 그는 설교의 유익이 내용을 낱낱이 기억하는 능력에만 달려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진리가 사람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 뒤에 그 인상이 회개와 경건한 생활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그러한 인상을 다시 일깨우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설교 전체의 유익을 단순히 사후 기억량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보다 잦은 설교가 반드시 무익하거나 해롭다는 판단에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에드워즈는 예배 후 성경이나 설교집을 더 읽는 일을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비슷한 진리를 다시 설교로 들을 때만 앞서 받은 은혜로운 인상이 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사도들이 한 지역에서 날마다 말씀을 전한 사례(행 2:42, 46; 19:8–10)를 제시하고, 이사야 62장의 밤낮 쉬지 않는 파수꾼을 부흥의 시대에 더욱 빈번해질 설교와 연결합니다. 또한 여리고 성을 도는 제사장들의 나팔과 희년의 나팔 소리를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될 때 힘 있게 전파될 복음의 예표로 해석합니다. 이 후자의 논거들은 에드워즈의 예표적·종말론적 독법이므로, 성경이 설교 횟수에 관한 보편적인 수치를 직접 정해 놓았다는 주장과 구별해야 합니다.
6. 신체적 현상을 너무 많이 일으킨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43–246쪽
에드워즈는 설교가 청중에게 강한 영향을 주어 떨림이나 울음, 힘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설교자와 부흥을 비난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의 목표는 사람의 몸에 특별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죄와 구원, 하나님의 영광을 명료하게 전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만일 성경의 진리를 정당한 방식으로 전하는 동안 신체적 반응이 동반된다면 그 반응 자체를 피하기 위해 진리를 약하게 전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특별한 신체 반응을 설교의 성과로 삼거나 인위적으로 유도해서도 안 됩니다. 에드워즈의 핵심은 현상의 존재만으로 부흥을 부정하지 말되, 참된 영적 은혜의 여부는 다른 성경적인 증거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관찰에서 신체적 현상을 참된 회심의 필수 조건으로 주장하는 설교자를 본 적이 없다고 밝힙니다. 반대자들이 일부 사람들의 행동이나 소문을 확대하여 모든 목회자가 넘어짐과 큰 소리를 성령의 명백한 표지로 취급한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부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진리를 강하게 깨달아 심신이 압도될 가능성은 인정합니다. 중요한 구별은 '그런 현상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그 현상을 목표로 삼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에드워즈는 전자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지만 후자를 부흥을 증진하는 필수 수단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7. 다른 사람을 보고 따라 하도록 방치했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47–249쪽
에드워즈는 다른 사람의 신앙적 감동을 보고 비슷한 반응을 나타내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람은 본래 주변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강렬한 신앙 경험이 공유되는 모임에서도 모방과 사회적 영향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을 통해 촉발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안에 참된 영적 의미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러한 영향이 특별히 오류와 과격한 행동을 확산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제4부에서 더욱 자세히 다룹니다. 따라서 모방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과 모든 영적 체험을 모방의 산물로 축소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당시 논란은 강한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같은 자리에서 머무르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회중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떼어 놓아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에드워즈는 무의미한 소란은 제어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이 말씀에 감동받아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는 일까지 해로운 모방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의 모범과 표현에 영향을 받으며, 그러한 영향을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 모임에서 실제로 해가 되는 혼란을 제한하는 것과 신앙의 선한 자극을 무조건 차단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변화와 감동을 다른 사람의 각성에 사용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감동받은 성도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격리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웃의 영적 열매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본보기나 격려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다만 집회에서 다른 사람이 따라 하도록 자극하는 소란을 일부러 조장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 모방의 작용을 하나님의 은혜 자체와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이 주장은 '영적 경험의 공유가 언제나 안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향이라는 경로만으로 체험 전체를 무효로 만들 수 없다는 논증입니다.
8.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50–257쪽
에드워즈는 영적인 진리를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그 내용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에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고 열정적으로 말하는 사례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대화의 빈도나 목소리의 강도만으로 그 행동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장황한 발언과 무질서한 권면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말의 내용과 태도,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한지, 교회의 질서를 지키는지가 함께 검토되어야 합니다. 제4부에서 제시하는 절제의 원칙은 여기서의 비난에 대한 답변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에드워즈는 강한 감동을 받은 성도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충동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표현의 방식은 상황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장광설이나 끝없는 권면, 비명에 가까운 발언은 실제로 선한 목적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3부에서 지나친 비난에 답변했다고 해서, 뒤의 제4부에서 구체적인 무절제를 책망할 여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부분은 '강렬한 감정의 존재를 곧바로 정죄하지 말라'는 원칙과 '그 감정의 표현도 지혜롭게 절제하라'는 원칙을 서로 보완합니다.
이 장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죄와 구원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이 침묵하기 어려울 만큼 강한 관심을 갖는 현상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에게 영원한 생명과 심판을 경고하고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간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이 명하지 않은 시간과 방식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인 것처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에드워즈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는 진실한 동기와 자기 열정 때문에 상대방의 사정과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는 과실을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말이 많다는 외적인 사실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을 무제한으로 권장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9. 모임시 찬양을 너무 많이 부른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58–261쪽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이 커지면 찬송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찬양하도록 반복적으로 명령하며, 장차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대에도 찬송이 풍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함께 모여 이전보다 더 자주 찬양한다는 이유만으로 부흥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다만 찬양의 분량이 증가한 사실과 찬양이 경외심 없이 무질서하게 수행되는 문제는 구별해야 합니다. 제4부에서 그는 찬송을 오락처럼 취급하거나 공적인 질서를 무시하는 관습에 대해서는 분명히 비판합니다.
에드워즈는 하늘의 성도와 천사들이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송한다는 성경의 묘사를 인용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찬양을 더욱 갈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제자들이 크게 찬송하자 못마땅해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부흥 반대자들의 불평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는 장래의 교회가 영광스럽게 회복되는 시대에 찬송도 매우 풍성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 기대는 공적 찬송을 오락처럼 소비하거나 새로운 찬양 관습을 교회의 동의 없이 성급하게 도입해도 된다는 승인과는 다릅니다.
10. 어린이들이 성경 읽고 기도한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한국어판 262–264쪽
에드워즈는 어린이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나타내는 일이 그 자체로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으며 자신의 이해와 능력에 따라 기도하고 다른 사람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린이의 신앙을 오직 어른의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흉내 내는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종교적 행동이 강렬하다고 해서 그의 회심을 무오하게 판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이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적인 가르침과 신중한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이 논의와 책 전체를 연결하는 원칙입니다.
에드워즈는 어린이들이 서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활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린이의 이해력과 분별력의 미숙함만을 지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도 인간적 관계를 맺고 영적 경험을 서로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한된 언어와 부족한 표현 가운데서도 진실한 마음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활동을 성인의 공적 설교 직무와 동일시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그는 연령을 이유로 성경 읽기와 기도를 무조건 금지하는 관점을 반박하면서도, 경험이 미숙한 사람에게 적절한 지도가 필요하다는 더 넓은 원칙을 유지합니다.
그는 어린아이의 기도에는 성인보다 문법이나 표현이 부족할 수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성인의 불완전한 기도 역시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표현이 미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린아이의 진지한 기도를 모욕하거나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실제로 그러한 모임에서 회심한 어린이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 신중히 가르치고 돌보는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제4부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피해야 할 일들
에드워즈는 제1~3부에서 부흥을 성령의 참된 역사로 옹호한 다음, 제4부에서는 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엄격하게 다룹니다. 그가 보기에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난도 위험하지만, 부흥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의 교만과 무분별함으로 그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참된 은혜와 인간적인 죄는 한 사람 안에서 함께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 자체를 인정하는 일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오류의 일반적인 원인 세 가지를 먼저 설명한 뒤, 실제로 공동체를 해친 특수한 오류들을 검토합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실제로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이 비난받는 까닭을 전부 '부흥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적대감'으로 돌리는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반대자들이 잘못을 과장하거나 악용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실제적인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흥을 사랑하는 사람의 단 한 가지 명백한 오류가 반대자에게 훨씬 강력한 공격 근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의 열기가 클수록 자신을 속이기 쉬우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 아래 결코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고 설명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깨어 시험을 경계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받았다는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핑계로 충고와 교정을 거부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1. 광신주의가 생기는 일반적 원인 세 가지
한국어판 277–382쪽
영적 교만
영적 교만은 모든 교만 중에 가장 가증스럽다
에드워즈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원인은 영적 교만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재산에 대한 자랑보다 더 은밀하고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은혜와 영적 경험을 기뻐하는 가운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만족감을 가지기 쉽습니다. 참된 성도의 마음에도 이러한 부패성이 남아 있으므로, 특별히 강력한 영적 감동을 경험했거나 부흥의 도구로 크게 쓰임받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은혜의 체험이 크다는 사실이 교만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보증은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가 영적 교만을 특히 위험하게 보는 까닭은 사람이 가장 선하고 거룩한 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자신을 높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재물이나 사회적 명예를 자랑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영적 기쁨마저 자기 성취의 증거로 바꾸어 버립니다. 외적인 열정이 강할수록 이 위험을 자각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에드워즈는 자신의 죄에 더 민감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더 온유해지는 겸손의 열매를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와 부족함을 쉽게 찾아내고 거친 언어로 정죄합니다. 그는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판단과 영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또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특별한 경험이나 집단적 정체성을 자랑하며, 다른 성도보다 자신이 더욱 거룩하다고 암시하기도 합니다. 반면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더 깊이 인식하여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합니다.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열매와 참된 겸손의 열매를 비교하면서 판단과 비난이 많고 자신에 대한 만족이 강한 상태를 매우 불길한 징조로 평가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소수의 열성적인 신자를 참된 성도로 높이 평가하는 반면, 자기 집단 밖의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냉담하거나 죽어 있는 신앙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성도는 자신에게 남은 부패함을 먼저 슬퍼하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쉽게 단정하지 않습니다. 에드워즈는 죄를 분명하게 책망해야 한다는 의무와 정죄하는 말투로 자신을 높이는 행동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아주 겸손한 성도는 온유와 부드러움의 옷을 입고 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태도를 참된 겸손의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무지하고 연약하게 행동할 때에도 온유함과 인내를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이 겟세마네에서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아시며 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죄 많은 피조물인 성도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모욕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어긋납니다. 에드워즈는 어린아이와 어린양처럼 부드럽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강조하면서, 참된 용기와 담대함을 무례함이나 거친 말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잠든 일을 특별히 중요하게 다룹니다. 극심한 고통 중이던 주님은 제자들의 부주의를 엄하게 책망하실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참으셨습니다. 에드워즈에게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지식이나 영적 체험이 많은 사람이 다른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를 재는 척도입니다. 자신이 옳은 진리를 말한다는 확신이 타인을 멸시할 권리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반대와 공격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을 향한 비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영적 교만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라고 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즉시 맞서서 반격하며, 상대방의 죄를 폭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실제적인 잘못이 없는지 먼저 살피고,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명예와 사역을 맡기는 태도를 가집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께서 모욕받으실 때 보이신 인내를 중요하게 평가하며, 부흥의 사역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투쟁보다 진리와 사랑을 잃지 않는 신중함이라고 강조합니다.
에드워즈는 자신을 향한 비난이 실제로 부당하더라도 모든 대응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면 참된 신앙의 열매를 드러내기보다 논쟁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억울한가 하는 문제만큼이나 상대방을 대하는 방식이 그리스도의 태도에 합당한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부흥의 도구로 쓰임받을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에드워즈는 부흥 사역에서 성공을 경험한 목회자와 평신도에게 특별히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여 많은 회심과 각성이 일어나게 하셨다고 해서 그의 모든 판단이 옳다거나 다른 사람 위에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세가 므리바에서 분노 가운데 말한 사건과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다가 심판받은 사건을 예로 들어, 좋은 목적이나 이전의 하나님의 은혜가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젊은 목회자는 자신이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유로 오래 사역한 목회자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도구가 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목사의 좋은 자질 가운데 하나는 반대자들에게 온유하게 잘 가르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의 잘못을 분명히 말해야 할 때에도 온유함을 잃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목회자의 임무는 상대를 꺾거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그의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더라도 조롱과 모욕이 그들을 바른 지식으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목회자에게 필요한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가 반대자들을 친절하고 인내심 있게 가르치는 능력이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적인 담대함과 그리스도를 닮은 온유함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디모데후서 2장 24–25절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의 종은 다투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가르치며 거역하는 사람을 인내로 권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오해를 품고 있을수록 설교자는 화난 마음으로 자기 권위를 증명하기보다 진리를 분명히 설명하고 그가 회개하도록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참된 교정은 상대의 영혼을 얻기 위해 행해지므로 형식과 태도 또한 복음에 합당해야 합니다.
잘못된 신학적 관점
하나님이 직통 계시를 통해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생각은 부흥에 가장 해가 된다
에드워즈는 성령께서 오늘날 신자들의 마음에 직접 새로운 정보를 주어 미래의 사건이나 구체적인 행동을 알려 주신다는 생각을 특히 위험하게 평가합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특정한 성경 구절이 갑자기 떠오르거나 강렬한 내적 인상이 생기면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인상이 성경의 원래 의미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에서 사울에게 주어진 특정한 명령이 오늘 어떤 신자에게 어느 마을로 가라는 직접 명령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성경의 말씀을 읽고 그 진리를 바르게 적용하는 일과, 그 문구를 매개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는 일을 구별합니다.
직통 계시 주장은 마귀가 부흥을 방해하는 데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충고와 성경적 검토를 거부하기 쉽습니다. 그 판단을 교정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행동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는 경건한 신자들조차 간절한 기도와 특별한 위로를 경험하는 가운데 어떤 사건에 관한 예측을 확신했으나 나중에 잘못으로 드러난 사례를 많이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내적 인상이 강하고 반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특별한 계시를 기대하는 마음이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거기서 생겨난 생각을 외부에서 주어진 신적 지시로 오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로마서 8장 14절과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인도를 특별한 미래 예측이나 사적인 명령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게 하시며, 성경의 계명을 바르게 분별하고 순종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2절을 연결하여 마음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 성령의 은혜로운 인도라고 설명합니다. 시편 119편과 같은 성경적 기도도 새로운 계시를 달라는 요청보다 이미 주어진 말씀을 깨닫고 사랑하며 행하도록 가르쳐 달라는 간구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충분성을 신뢰한다는 것은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의 참된 방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설교에 있어 직통 계시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을 진리와 거룩한 감정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기도와 설교가 더욱 풍성하게 표현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새로운 문장을 초자연적으로 불러 주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게 하시고 사랑과 감사, 경외와 회개의 마음을 일으키심으로써 신자가 자발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를 기대한다는 이유로 신학 연구와 설교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에드워즈는 성경 연구와 교육, 훈련이 목회자를 준비시키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반적인 수단이라고 봅니다.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해서 너무 많은 것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
에드워즈는 깊은 영적 감동과 확신 가운데 기도했다는 사실로부터 구체적인 결과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정하는 오류를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지혜와 자비로 응답하신다는 약속은 참되지만, 기도자가 원하는 특정한 결과가 언제나 하나님의 최선이라는 보증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더욱 깊이 신뢰하도록 도우실 수 있으나, 그 신뢰가 미래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을 알려 주는 새로운 계시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매우 열심히 기도했거나 특별한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도의 응답을 확보한 공로처럼 여기면 자기 의와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에 자신을 겸손히 맡기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간접적으로 성령이 주신 정당한 욕구라 할지라도 표출할 때는 절제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혜로 다른 영혼을 향한 사랑과 경고의 마음을 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구체적인 행동까지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진실로 좋은 목적을 가지고도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상대에게 해로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하는 사람의 영도 자신에게 제재를 받는다는 말씀을 인용하며, 강렬한 감동이 있어도 시간과 장소, 표현의 방식과 공동체의 질서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적인 예배 중 갑자기 외치거나 밤낮없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권면하는 행동이 언제나 성령의 뜻이라고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목사들은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면서 분별력을 가지고 지혜롭게 일처리를 해야 한다
에드워즈는 당장 어떤 행동이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장기적인 유익과 해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하게 명령된 의무라면 예상되는 어려움 때문에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지만, 구체적인 방법과 시기가 성경에 정해지지 않은 문제에서는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는 목회자를 농부와 건축자, 청지기와 어부에 비유하며, 그들이 모두 현재의 행동이 가져올 이후의 결과를 내다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복음 자체가 반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사역자의 불필요한 무례함 때문에 반대가 발생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 한 사람이라도 더 얻고자 했던 태도는 참된 사역자의 지혜를 보여 줍니다.
박해의 필요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불신자들을 잘못된 태도로 대하게 만든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을 곧바로 복음에 충성한다는 증거로 삼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진리 때문에 박해받는 일은 성도에게 일어날 수 있지만, 불필요한 거친 행동으로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에 검을 가져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나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리스도인이 의도적으로 분쟁을 조장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어떤 새로운 관행이 선하더라도 교회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도입하면 오히려 교회의 유익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상황과 사람들의 수용 능력을 고려하여 행동한 사례를 통해 지혜롭고 점진적인 개혁을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성공하게 하시는 것이 곧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승인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사역을 크게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승인하셨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결함이 있는 사람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야곱이 언약의 복에 참여했지만 속임수를 사용한 행동은 잘못이었다는 사실과, 유다가 사도적인 사역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의 악한 생활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또한 참된 신자가 잘못된 정보를 믿고 하나님께 진실한 감사와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체험의 진정성과 체험을 일으킨 판단의 정확성, 하나님의 섭리적인 성공과 개인적인 행동의 도덕적 정당성을 각각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섭리를 해석하는 최종적인 규범이며, 섭리는 성경의 명백한 명령을 무효화하는 독립적인 계시가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외양에 있다는 것이 외적 질서를 무시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신앙의 본질이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외적인 질서와 규례를 경시하는 관점을 비판합니다. 성경이 종이와 잉크로 전달되지만 그 때문에 성경의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듯, 교회의 제도와 질서도 영적 생명 자체는 아니지만 그 생명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공동체는 서로 다른 직무를 맡은 지체들이 한 몸으로 협력할 때 유익을 얻습니다. 그는 군대의 질서와 성을 보호하는 울타리, 바닷물을 막는 둑의 비유를 사용하여 질서가 무너질 때 교회가 무분별한 열심과 분열, 잘못된 가르침에 취약해진다고 설명합니다. 특별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정기적인 가정예배를 습관적으로 소홀히 하는 일이나 영적 경험만을 기준으로 교육받지 않은 사람에게 공적인 목회 직무를 맡기는 일도 이러한 오류의 표현입니다.
목사들이 옛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에드워즈는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사자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종류나 정도의 권위를 행사할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와 사도, 특별한 계시를 받은 선지자와 일반적인 교회 목회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과 관계되지만 그들에게 맡겨진 권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과 태도를 목회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내세우는 데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의 공적인 직무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가 무오한 심판자나 새로운 계시의 전달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질서와 목회자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권위와 성경의 말씀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영적 체험에 대한 무지
참된 성도들의 체험 속에도 불순물이 섞여 있다
에드워즈가 지적하는 세 번째 원인은 자신의 영적 체험과 그 외적 결과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은혜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순수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사람은 여전히 연약하고 죄의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자연적인 감정과 자기 사랑, 상상력과 영적 교만이 함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참된 체험에 혼합되는 세 가지 불순물로 자연적 감정과 열정, 상상력에 남는 인상, 자기 의와 영적 교만을 구분합니다. 이러한 구별이 없으면 사람은 감정의 강렬함이나 특별한 이미지를 성령의 은혜 자체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영적 체험에 자주 혼합되는 첫 번째 것은 자연적 감정이다
사람은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영적인 깨달음을 경험하고도 매우 다른 감정적·신체적 반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과 큰 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다른 사람은 깊은 평안 가운데 조용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사람도 자신의 건강과 심리적 상태, 체험의 새로움과 주변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에드워즈는 거룩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감정과 결합된 모든 자연적인 열정이 거룩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두려움이나 기쁨이 지나치게 강하게 표현될 때에는 그 사람의 기질이나 몸의 상태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체험을 한 두 성도를 놓고 누가 더 크게 울었는지를 비교하여 누가 더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겸손과 사랑이 순간적인 반응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에 자주 혼합되는 두 번째 것은 상상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늘의 기쁨을 깊이 생각할 때 상상력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일정한 이미지는 진리를 생생하게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열정이나 상상이 지나치게 증폭되면 그것이 신앙의 실질적인 깨달음을 가리거나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상상력 자체가 죄이거나 거짓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 진리를 묵상하면서 생긴 생생한 이미지나 장면을 하나님께서 실제로 눈앞에 보여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또 감정이 강할수록 그 이미지의 사실성에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진리에 대한 영적 이해와 자연적인 표상의 생생함을 구별하며, 사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는 것을 어떤 그림이 마음에 또렷하게 떠올랐는지만으로 입증하려 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에 자주 혼합되는 세 번째 것은 자기 의다
에드워즈는 참된 기쁨에도 자신이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자기만족이 섞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뻐했지만, 점차 그런 체험을 한 자기 자신의 탁월함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열심에도 인간적인 분노와 증오가 섞이기 쉽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에도 자기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애착이나 이성에 대한 자연적인 감정이 혼합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순수한 은혜와 부패한 요소가 어떤 비율로 섞여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강한 감정과 많은 종교적인 말보다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성품을 더욱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야 할 체험이 부족하면 성도들은 기형적으로 된다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가 존재하는 체험에도 중요한 성품이 부족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구원의 기쁨만 강하게 의식하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위엄을 충분히 경외하지 않으면 주제넘은 자신감과 경박한 태도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과 거룩하심만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면 지나친 두려움과 불신으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탁월한 영적 체험은 가장 큰 소리를 내고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체험이 아니라, 불순물이 적고 하나님의 여러 완전한 성품을 균형 있게 깨달으며 그에 합당한 거룩한 감정이 깊어지는 체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깨달음이 더해질 때 격렬한 흥분은 가라앉아도 영적인 기쁨은 오히려 더 견실하고 평온하게 나타나는 사례를 관찰했다고 증언합니다.
성도들의 영적 체험이 나쁜 쪽으로 변질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영적 체험의 또 다른 위험으로 변질을 지적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 중심에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상력과 자연적 흥분, 자기 만족과 집단적 적개심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겉으로는 감정의 강도가 높아졌는데도 실제로는 참된 은혜의 영향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열심이 상대방을 향한 분노로 바뀌고, 형제 사랑이 자기편에 대한 배타적인 애착으로 바뀌는 현상이 그 사례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연결하여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의 방식으로 유지하려는 위험을 경고하며, 과거의 특별한 은혜를 자기의 소유처럼 의지하지 말고 계속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현세적인 것을 지나치게 부정하는 것은 사탄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과 같다
에드워즈는 성화를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가족과 친구를 향한 자연적인 애정 자체를 제거하려는 극단도 경계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의 구원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간절히 위해 기도하거나, 목회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특별히 염려하는 것은 정당한 책임의 표현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 깊은 슬픔과 간절함을 나타낸 사실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높이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정당한 애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인간의 창조된 본성과 관계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랑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 나타나도록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체험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데에는 관습이 큰 영향을 미친다
에드워즈는 내적 체험의 진정성과 그것의 외적인 표현을 다시 구별합니다. 같은 종류의 깊은 영적 감정을 경험하더라도 지역의 관습, 주변 사람들의 기대, 반복적으로 목격한 행동과 개인의 습관에 따라 외적인 반응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강한 신앙 감정이 나타날 때마다 큰 소리로 외치거나 격렬하게 행동하는 관습이 형성되면, 시간이 지나 내적인 감동은 작아졌는데도 외적인 표현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는 참된 체험과 동반되는 눈물이나 몸의 반응을 무조건 억제하는 것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특별한 성령의 표지로 여기고 제한 없이 격려하는 일도 반대합니다. 목회자는 감정의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유익을 주는지 살피고, 신자들이 겸손과 질서 가운데 그 감정을 표현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2. 특수한 오류들
한국어판 383–420쪽
다른 사람을 회심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오류
에드워즈는 부흥 때 나타난 가장 심각한 특수한 오류로,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정상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함부로 판단하는 행동을 지적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다른 사람과 처음 대화할 때 그의 영적인 경험을 평가하고, 그가 실제로 거듭난 사람인지 결론 내리려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목회자를 향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자기처럼 열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그가 전하는 모든 설교와 기도까지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관습이 편견을 강화하고 교인과 목회자의 관계를 파괴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는 과거 노샘프턴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러한 관습 없이도 방문 목회자들의 설교를 기쁘게 듣고 풍성한 열매를 경험했다고 회상합니다. 최근의 일부 설교자는 자신이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를 교회에서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드워즈는 그것이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권을 침해하는 행동이라고 반대합니다. 부흥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목회자의 잘못은 성경적으로 책망할 수 있고 필요한 교회적 조치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는지, 끝내 회심하지 않을 것인지를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한 사울에게도 은혜를 베푸셨고 완고했던 종교 지도자들을 변화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에드워즈는 목회자가 말씀으로 회중의 양심을 날카롭게 살펴야 한다는 사실과 자신이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장이 되는 일을 구별합니다. 교회 안에 일부만을 참된 회심자라고 인정하여 특별한 명칭으로 구분하고, 이미 받아들인 교회 회원들을 다시 사적으로 배제하는 행위도 비판합니다. 또한 공적인 기도에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을 끼워 넣거나, 어떤 사람이 회심하지 않으면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을 엄중하게 거부합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회심과 구원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는 방법을 인간이 지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엄격한 권면과 타인의 최종적인 영적 지위를 판정하는 일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는 특히 목회자에 대한 회심 판정이 실제로 유익을 얻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판정을 근거로 목회자를 몰아내거나 각성시키고자 했지만, 에드워즈의 관찰로는 오히려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가 악화되고 설교의 유익이 줄었습니다. 그는 그런 비난으로 한두 사람이 각성했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훨씬 많은 목회자가 부흥에 더욱 반감을 품게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나오는 제사장들의 회심과 박해자 사울의 변화는 당시 완고하게 보이는 사람도 이후에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제시됩니다.
그는 이러한 성급한 판정을 공적 기도에까지 끌어들이는 잘못도 책망합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가 거듭나지 않았다는 자신의 의심을 사실인 것처럼 회중 앞에서 공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이 회심하지 않을 바에는 죽게 해 달라는 식으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를 로마서 12장 14절의 축복 명령과 어긋나는 사실상의 저주라고 평가하며, 그 사람의 장래와 구원의 여부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 교회의 유익과 영혼의 회심을 간구할 수는 있지만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미리 정하여 요구할 권한은 없습니다. 또한 기도 중 어떤 표현이 마음속에서 강하게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을 성령께서 직접 명령하셨다고 간주해서도 안 됩니다. 에드워즈는 성령이 마음을 진리와 거룩한 감정으로 채우시는 은혜로운 역사와 특정한 문장을 자기 뜻과 무관하게 발설하게 되는 경험을 구별합니다.
평신도 설교와 관련된 오류
에드워즈는 평신도에게 신앙적인 권면을 전면 금지하는 것도, 모든 성도가 공적인 설교자의 직무를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도는 서로 권면하고 진리를 나누며 죄를 경계하도록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공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직무는 별도로 세워진 권위와 책임을 갖습니다. 두 행동은 같은 성경 내용을 다루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말투, 가르침의 형식과 공적인 성격에 차이가 있습니다. 평신도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목회자와 같은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신앙적인 대화에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거나 예배당에서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공적인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미리 집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공식적인 가르침의 주체가 되어 사람들을 지휘하거나, 자신에게 맡겨진 생업과 책임을 계속 소홀히 하면서 권면 자체를 자신의 특별한 직업처럼 수행한다면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부모가 자녀를,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합당한 권한도 구분합니다. 또한 평신도가 공적인 예배 중에 충동적으로 발언하거나, 감동받았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끝없이 말하는 습관을 경계합니다. 권면의 목표는 자기의 열정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에 실제적인 유익을 주는 데 있어야 합니다.
권면과 설교의 경계는 단순히 말하는 인원이나 장소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에 남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 경우와, 미리 회중을 모아 자신을 공식적인 교사로 내세우는 경우를 구분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기준은 사전 계획과 집회의 성격, 발언에 담긴 권위의 주장,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실제적인 직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지위와 나이의 관습 속에서 여성과 어린이에게 신중함을 요구했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그들이 간절하게 신앙적인 말을 하는 모든 경우를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평신도가 자신에게 맡겨진 생업과 가정의 책임을 지속적으로 버린 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권면을 자신의 주된 직업처럼 수행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교회의 공적인 교사가 되려면 특별한 직무와 책임이 맡겨져야 하며, 단순한 감동이나 두드러진 개인 경험만으로 그 직무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공적인 예배 도중 갑자기 발언하거나 높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외치는 행동도 상대방의 유익과 교회의 질서를 고려하여 절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영혼의 영원한 가치를 온전히 아셨지만, 그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항상 큰 비명을 지르거나 무제한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이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비교입니다. 좋은 열심은 강도만으로 평가되지 않으며,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적절한 형식 속에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찬양과 관련된 오류
에드워즈는 부흥의 때에 찬송이 더욱 풍성하게 불리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찬양은 사람의 즐거움을 위한 오락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한쪽에서 찬송하는 동안 다른 이들이 세속적인 대화를 계속하거나 찬송을 유행가처럼 가볍게 취급한다면, 그 행위에는 필요한 경외심이 부족합니다. 기쁨이 풍성할수록 오히려 누구를 찬양하는지, 그분의 영광과 거룩함이 무엇인지 더욱 의식해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함께 찬송하는 일에 대해서는 보다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거리나 이동 중의 공적인 찬양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며 기뻐한 사건과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찬송 등에서 합당한 근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허용된다는 사실과 그 행동을 지금 당장 새로운 공동체 관습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판단은 다릅니다. 교회가 준비되지 않았거나 지도자와 상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추진하면 유익보다 분쟁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는 예배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고, 합당한 시기와 방법을 선택하여 찬양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에 이바지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때 그가 사용한 성경적 사례는 언약궤를 옮길 때의 찬양 외에도 이사야 30장 29절, 시편 42편 4절, 시편 100편 4절과 122편 1절의 예배를 향한 기쁨입니다. 그는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면서 찬송하는 장면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공동 예배에 연결되는 새로운 관습에는 지도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히브리서 13장 17절의 목회적 책임을 언급합니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 온 열성적인 사람들이 현지 목회자와 상의하지 않고 낯선 관습을 세우는 일은 더욱 부적절하다고 평가합니다.
제4부 결론: 두 극단 사이에서 성경적 분별을 지켜야 한다
에드워즈는 부흥에 나타난 오류들이 뉴잉글랜드의 신앙적 각성과 교회의 일치에 실제적인 피해를 가져왔다고 평가합니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 오류를 근거로 성령의 참된 역사까지 부정하려 했고, 부흥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별한 열정과 경험을 절대화하여 오류를 시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한쪽의 잘못을 발견했다고 해서 즉시 정반대의 극단으로 움직이는 태도를 경고합니다. 참된 은혜를 옹호하면서 오류를 엄격히 교정하고, 강렬한 신앙 감정을 인정하면서 그 표현에 온유와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부흥의 성숙은 현상이 더 격렬해지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과 사랑, 거룩한 분별과 실제적인 순종이 더욱 아름답게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부제5부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
1. 부흥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
한국어판 423–432쪽
에드워즈는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한 첫 번째 실천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 이미 부흥을 방해하고 있는 죄와 오류를 제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고 장애물을 치우라는 말씀을 연결하며, 회개와 화해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맞이하는 중요한 준비임을 설명합니다. 이 의무는 부흥을 반대했던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를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편견을 퍼뜨린 사람도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해야 하지만, 부흥을 지지하면서 다른 성도의 회심 여부를 함부로 판단하고 거칠게 비난했던 사람도 자신이 끼친 피해를 인정해야 합니다. 공적인 잘못은 가능한 경우 공적으로 시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는 부흥 지지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반대자가 그것을 이용해 부흥 자체를 더 심하게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를 예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 때문에 명백한 죄를 감추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자신의 판단을 철회하고 잘못을 인정한 일부 부흥 사역자의 사례를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회개가 악용되더라도 장기적으로 진리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자기의 체면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고, 부흥의 참됨은 참여자들이 무오하다는 주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또한 에드워즈는 부흥에 대한 의견이 다른 성도들이 서로 온유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상대편을 모욕적인 이름으로 부르거나 집단을 나누어 적대적인 세력으로 취급하면 갈등은 더 깊어집니다. 부흥에 열심인 사람의 실제적인 잘못은 고쳐야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은혜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쇠퇴하고 잘못된 관습에 젖어 있다면 그 문제들을 모두 단번에 고치기 어렵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성급한 분리와 무리한 개혁을 추진하기보다 성경의 명백한 명령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에드워즈는 아가서의 사랑하는 자와 폭풍 가운데 주무시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교회가 자신의 조급함을 버리고 주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신뢰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에드워즈가 특히 강조하는 첫 번째 실천은 부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부당하게 방해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행동은 단지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한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에 등을 돌리도록 영향을 끼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개적인 비난으로 피해가 일어난 경우에는 회개도 관계와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동시에 부흥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비난과 조롱을 되풀이하지 말고 서로 적대적인 명칭을 붙여 편을 나누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편 가르기는 서로의 적개심을 강화하여 함께 기도하고 사역할 수 있는 길을 막습니다.
2. 부흥을 위해 직접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한국어판 433–479쪽
에드워즈는 각 사람에게 맡겨진 역할을 설명하기 전에, 누구나 먼저 자신의 영혼을 살피고 참된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특별한 시기는 자신의 회심과 성화에 무관심하게 머무를 때가 아닙니다. 그는 이사야 55장의 생명수로 향하는 초청과 요한복음 7장,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청을 부흥의 시대에 연결합니다. 자신은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체험과 오류를 판단하는 데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위험합니다. 부흥을 돕는 첫 번째 책임은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실제로 알고 그 은혜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부흥 반대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
에드워즈는 부흥을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의 회심과 신앙의 상태를 검토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는 그들의 구원 여부를 인간이 판단할 권한은 없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된 경험과 거짓된 소망을 비판하는 데 몰두하면서 정작 자신이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경험했는지 살피지 않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특히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뉴잉글랜드의 부흥이 성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신앙의 회복인지 진지하게 검토하라고 요청합니다. 만일 이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은혜를 선명하게 나타낸다면, 그 사실이 자신의 구원론과 충돌하지 않는지, 기존 신학적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지 않는지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민수기 10장 29절에서 모세가 호밥에게 함께 가자고 권면한 사건을 인용하면서 반대자들도 참된 은혜에 참여하도록 겸손히 초청합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때가 그 은혜를 고의로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때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사야 61장,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장면을 연결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엄위하심이 함께 드러나는 시기를 설명합니다. 이 경고는 개별 반대자의 영원한 운명을 저자가 직접 판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명백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완고한 반대를 위험하게 여기라는 요청입니다.
그는 부흥을 반대해 온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일이 단순히 체면을 잃는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진실을 회복하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정직하게 다루고,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에드워즈는 새로 나타난 부흥을 인정하려면 자신의 신학 체계도 바꾸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당시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부흥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인정하는 것과 기존의 인간 중심적 구원론 사이에 정말 안전한 중간 지대가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 대목은 부흥에 관한 중립적인 요청이 아니라 당시 신학 논쟁 속에서 자신의 개혁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는 주장으로 읽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
에드워즈는 당시 부흥의 영향이 특히 젊은 세대에게 두드러졌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고 사회적 경험이 많다는 사실이 반드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에 참여한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는 광야에서 불순종하다 멸망한 출애굽 세대와 여호수아를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간 젊은 세대를 비교합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의 역사와 선지자의 경고를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대 가운데 회개와 간구의 영을 일으키실 때 이전 세대가 완고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은 그가 당시 뉴잉글랜드의 세대별 부흥 양상을 비추어 설명하는 역사적·유형론적 적용이라는 점에서 구별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실제로 부흥의 은혜를 경험한 사례가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은 오랫동안 익숙한 신앙 관습이나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령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고 성령의 역사에 응답하는 마음입니다. 나이 든 성도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얕보거나 무분별하게 그들의 모든 감정을 승인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따라 분별하면서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는 특히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새로운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일과 이전 세대가 믿지 않아 심판을 받은 사건을 비교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 자체가 성령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하는 원인은 아니지만, 오래된 습관과 체면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고집한다면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잘못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연장자들이 젊은 세대의 변화와 회심을 시기하거나 가볍게 보지 말고, 자신도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목사들이 해야 할 일
에드워즈는 목회자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참된 회심과 성령의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많은 성도가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변화되는 가운데 정작 목회자가 이러한 체험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는 설교와 상담에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아는 척하는 위선적인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는 부흥에 나타나는 참된 은혜와 인간적인 오류를 구별하여 지도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첫 번째 의무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고 말씀에 따라 실제로 거듭난 은혜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목회자에게 평소보다 더욱 풍성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금식하고 기도해야 하며, 인근의 목회자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서로 방문할 때 세속적인 대화와 오락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기도와 찬송, 신앙적인 대화에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또한 자신들을 비난하는 성도들이 잘못을 범했더라도, 목회자 자신의 냉담함이 그런 비난의 구실을 제공하지 않았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 방어보다 겸손과 실제적인 경건입니다.
목회자는 부흥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여러 목회자가 함께 설교의 주제를 의논하고 짧게 말씀을 전한 뒤 서로 검토하고 권면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는 이러한 협력이 성도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진지하게 듣도록 도울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다른 교회를 방문한 목회자가 그 교회의 목회자를 약화시키거나 교인들의 신뢰를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동역자들은 교리나 생활에서 교회적 조치가 필요한 잘못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합당한 직무와 관계를 견고하게 세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목회자에게 학식과 재능뿐 아니라 열심과 용기, 끈기 있는 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조지 휫필드의 넓은 순회 사역과 역사적인 지도자들의 강한 결단력을 예로 들며, 아무리 뛰어난 지식을 가졌어도 냉담하고 우유부단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평범한 재능이라도 거룩한 열심과 결합하면 커다란 유익을 줄 수 있으며, 탁월한 신학적 재능에 그러한 열심이 더해지면 더욱 큰 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열매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 후보자는 일반 교회 회원보다 더 엄격한 자격과 경건의 검증을 받아야 하며, 특별한 영적 경험만으로 곧바로 목회 직무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과 성경 지식이 서로 대체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먼저 자신이 실제로 중생의 은혜를 경험했는지 살피고, 이미 목회하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새롭게 수행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목회 후보자가 단지 학문적인 시험을 통과하거나 외형적인 교회 회원 자격을 가진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건전한 교리와 눈에 보이는 경건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은혜를 직접 내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교회가 지도자를 세울 때 분별하고 훈련하는 책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대학 교수들이 해야 할 일
에드워즈는 당시 대학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목회에 적합한 젊은이를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대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기관이 아니라 경건한 사역자를 양성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대학이 악덕과 게으름, 도덕적 타락에 방치되어 학생의 신앙에 오히려 악영향을 준다면 설립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교육은 인간적인 학식과 함께 실제적인 거룩함과 신앙의 성숙을 추구해야 하며, 학생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신학교육자 필립 도드리지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도드리지는 학생들에게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철저히 가르치는 동시에, 각 학생과 개별적으로 만나 그의 영적 상태에 관해 대화하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지도에 많은 시간이 들지만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교육이 교회에 경건하고 유능한 목회자들을 공급하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적인 탁월함과 실제적인 경건은 따로 추구해야 할 경쟁적 목표가 아니라 목회자 양성에 함께 필요한 조건입니다.
에드워즈가 대학 교육자의 책임을 따로 거론하는 것은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교육 기관이 장래의 목회자와 사회 지도자를 길러 내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교수가 학생의 영적 각성을 무시하거나 조롱한다면 그 영향이 한 학생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후 여러 교회로 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학문적 훈련과 신앙의 진지함을 함께 가르친다면 경건한 지도자를 준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수의 직무를 단순한 지식 전달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입니다.
부자나 사회 지도층이 해야 할 일
에드워즈는 공적인 설교 직무를 맡지 않은 평신도 가운데도 부흥에 특별히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장려하고 복음의 확산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기뻐한 일을 예로 들어,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적극적인 경건을 나타내는 일을 자신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명예는 세상적인 체면을 유지하는 데보다 하나님을 높이고 공동체의 선을 이루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한 부유한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는 성막 건축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자원하여 헌신한 사람들의 사례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재산을 쌓아 두거나 자신의 명성을 과시하는 데 만족하기보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재산의 사분의 일 정도를 부흥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는 예를 들지만,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25퍼센트를 바치라고 정한 보편적 규정이 아닙니다. 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물질을 많이 맡기신 사람이 그만큼 적극적이고 희생적으로 복음의 유익을 위해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재산을 사용할 실제적인 방법도 제시합니다. 복음이 충분히 전해지지 않는 곳으로 경건하고 유능한 설교자를 파송하도록 후원할 수 있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재능 있는 어린이를 교육하여 목회 사역을 준비시킬 수 있습니다. 신앙에 유익한 서적을 인쇄하고 먼 지역까지 널리 보급하거나, 가난한 마을에 학교를 세워 일반 교육과 기독교적 신앙교육을 함께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런 사역을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미래의 교회를 준비하고 복음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방식으로 평가합니다.
에드워즈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경건한 행동을 부끄러워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신앙을 멀리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반면 다윗이 언약궤를 옮길 때 많은 백성 앞에서 기쁨을 표현한 사건은, 위엄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나타낸다고 해서 참된 명예를 잃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는 가난한 이들을 실제로 도울 능력과 책임도 그만큼 크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사회적 영향력과 물질은 신앙적 명성을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복음 사역을 돕는 청지기적 자원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해야 할 일
(1) 금식과 기도
에드워즈는 모든 성도에게 공통으로 요구되는 첫 번째 실천으로 금식과 기도를 제시합니다. 부흥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그 은혜가 지속되고 더욱 확산되도록 기도해야 하며, 부흥이 인간의 오류와 사탄의 방해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더욱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자신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정하셨습니다. 에스겔 36장 37절에서 회복의 약속을 주시면서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것을 구하도록 하셨고, 스가랴 12장 10절은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간구하도록 하시는 은혜를 더욱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기도는 자기 마을과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아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이 온 나라와 온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고 성령의 은혜가 풍성하게 부어지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에 풍성한 은혜를 주시려 할 때 먼저 은혜의 결핍을 절감하게 하시고 간절한 기도의 영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는 뉴잉글랜드 부흥의 어려움이 인간의 자만심을 낮추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목회자의 냉담함에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기보다 목회자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설교자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성도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소그룹별 기도와 온 교회의 공동 기도, 개인 기도와 가정예배를 하루의 흐름 속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더 나아가 여러 지역의 교회가 동일한 날을 금식기도일로 정하여 함께 회개하고 감사하며 성령의 부으심을 간구하는 전국적인 기도 운동도 제안합니다. 목회자들이 기도의 목적과 날짜를 정한 제안서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교회들의 참여를 조직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공개적인 기도뿐 아니라 마태복음 6장이 가르치는 은밀한 개인 금식 역시 성도들이 자주 실천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합니다.
에드워즈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금식기도일은 오전의 개인기도·가정예배로 시작하고, 이어 연령과 처지에 따라 구성된 작은 기도모임에서 함께 간구한 뒤, 정오 무렵 전체 회중이 모여 공적인 기도와 설교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다시 소그룹 기도 및 가정 기도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 종일 모임을 채우는 데 있지 않고, 큰 집회의 공동체성과 작은 모임의 적극적인 참여를 함께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는 전국적인 연합기도도 막연히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목회자들이 날짜와 목적을 정하고 제안서를 인쇄·배포하며, 참여 교회와 목회자의 이름을 다시 모아 공표함으로써 서로 같은 시간에 기도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절차를 제안합니다. 이 구성은 교회 사이의 신뢰와 공동의 책임을 높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공개적 기도와 달리 개인 금식은 횟수와 일정을 일률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특별한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 자주 실천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합니다.
그의 제안은 막연히 '기도를 더 많이 하자'는 구호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개인과 가정, 가까운 이웃들의 소그룹, 전체 회중이 각각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필요하다면 지역 교회들이 날짜를 맞추어 하루를 금식과 간구에 바치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런 모임에서는 자기 교회의 성장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회심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되는 일을 함께 구해야 합니다. 그는 목회자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그들이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받도록 중보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보스턴을 중심으로 목회자들이 서면 제안을 돌리고 뜻을 모아 공동의 금식기도일을 정할 수 있다는 구상까지 제시합니다. 은밀한 기도만큼 은밀한 금식도 성경이 인정한 의무이며, 외적인 금식 자체가 부흥을 발생시키는 기술은 아닙니다.
(2) 성찬식
에드워즈는 부흥의 시기에 설교와 기도, 찬송이 크게 증가했는데도 성찬을 시행하는 횟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구속의 은혜를 기뻐하는 성도라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도록 제정하신 성찬에도 더욱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합니다. 초대교회가 주일마다 구속주의 고난을 기념했다고 이해하며, 부흥의 시대에는 평소보다 더 자주 성찬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에드워즈의 부흥관이 특별한 영적 체험과 집회의 열정에만 머물지 않고 말씀과 기도, 성례라는 교회의 일상적인 은혜의 수단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에드워즈는 설교와 기도, 찬양은 이전보다 훨씬 빈번해졌는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이 증가하지 않은 점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주일 성찬 관습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욱 풍성하게 드러나는 때에 주의 만찬을 더 자주 행하는 것이 합당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새로운 계시로 빈도를 강제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주어진 성례를 교회의 영적 생활에서 홀대하지 말자는 요청입니다.
(3) 이웃에 대한 도덕적 의무
에드워즈는 모든 성도의 의무 가운데 이웃을 향한 도덕적인 순종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신뢰하는 내적인 태도에 있으며,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배와 기도, 찬송과 성례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와 정직, 자기 부인과 온유함, 이웃에 대한 용서와 사랑으로 나타나는 도덕적 행위입니다. 에드워즈는 이 두 영역 가운데 도덕적 순종이 참된 신앙을 더욱 분명하게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 곁의 이웃은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사야 1장과 58장, 아모스 5장과 스가랴 7장, 예수님의 바리새인 책망과 마태복음 25장의 심판 장면을 인용합니다. 성경은 제사와 기도에 열심이면서 정의와 긍휼을 소홀히 하는 위선을 반복해서 책망합니다. 세례 요한도 회개를 선포하면서 옷과 음식을 나누고, 세금을 정직하게 거두며,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억압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는 사람은 공적인 예배의 열정뿐 아니라 가정과 직업, 경제 활동과 인간관계에서 바뀐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언어는 신앙고백이 될 수 있지만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순종은 더 분명한 실천입니다.
에드워즈는 이웃 사랑 가운데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과 구제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성도가 자신의 재산에는 인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흥의 정신과 어긋납니다. 그는 이사야 58장 7–11절과 시편 112편을 들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게 특별한 영적인 위로와 인도하심을 약속하셨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요한일서 3장 18–19절을 통해 말뿐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행동이 자신의 믿음을 살피고 확신하는 데 유익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논지는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종의 수단을 통해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참된 은혜의 열매를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이러한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소돔의 포로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그분을 물질로 섬긴 여인들, 리브가와 고넬료의 사례를 길게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출한 뒤 재물을 사양했으며, 이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도왔던 여인들은 부활의 소식을 먼저 접하고 주님을 만나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리브가는 낯선 나그네와 낙타를 돌보는 친절을 나타냈고, 고넬료는 기도와 풍성한 구제로 기억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사건에서 이웃에게 베푸는 자비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교훈을 발견합니다. 역사적인 사례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물질 나눔, 프랑케의 교육과 구제 사업, 휫필드의 자선 활동을 언급하면서 부흥의 건강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가 풍성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강조합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자선을 통해 영적인 위로와 확신을 기대하는 것이 자기 의에 불과하다는 반론을 별도로 검토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이웃을 돕는 일이 모두 자기 의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다른 신앙적 의무에도 같은 비판이 적용될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선행으로 하나님을 움직여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명령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엄격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제에는 인색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종교적인 활동을 자랑하기 쉽다는 그의 관찰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제는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아니라, 참된 은혜의 열매이자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도하고 위로하시는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는 순종의 수단으로 구별됩니다.
그는 이런 도덕적 의무가 단순히 예배의 부차적인 결과가 아니라 참된 신앙을 드러내는 중요한 열매라고 봅니다. 이사야 58장에서 참된 금식은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난한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자비와 연결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열매를 묻는 사람들에게 옷과 음식을 나누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말라고 대답한 사실도 인용합니다. 에드워즈가 구제를 강조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선행의 대가로 칭의를 주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값없이 받은 은혜가 실제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명하신 사랑의 의무와 영적 복을 연결하셨다는 그의 해석 때문입니다.
(4) 언약 갱신
에드워즈는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공적이고 엄숙하게 갱신하는 일을 부흥을 촉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제안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신앙고백을 반복하는 행사가 아니라, 실제로 소홀히 했던 의무와 자주 범한 죄를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새롭게 결단하는 일입니다.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의 실제적인 문제를 반영하여 언약의 초안을 작성하고, 성도들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숙고하도록 설명해야 합니다. 이후 참여하는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서명하고, 금식과 기도의 날에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서 그 내용을 공적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이루어진 언약 갱신 이후 특별한 영적 유익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긍정적으로 소개하지만, 교회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추진하면 오히려 반대와 논쟁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언약 갱신을 감정적인 결단을 강요하는 집회로 만들기보다 회중이 충분히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자원할 때 시행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목회자가 교회의 반복적인 죄와 소홀히 해 온 의무를 고려하여 문안을 준비하고, 이를 미리 알린 다음 성도들이 공개적으로 새로운 순종을 약속하도록 제안합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역사적 사례를 참고하지만, 서약의 형식 자체가 은혜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공동체의 영적 상태가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는데 성급히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중요합니다.
부흥 잡지를 발간하는 것은 부흥 확산에 큰 도움이 된다
에드워즈는 마지막으로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소식을 한 달 또는 보름마다 정기적으로 출판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당시 부흥에 관한 정보가 느리게 전달되고, 때로는 편파적이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보고가 확산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합니다. 한 지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지역에 정확하게 알리면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더욱 간절한 기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는 교통과 인쇄의 중심지인 보스턴의 목회자가 여러 지역의 소식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정기적인 출판물을 발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제안은 부흥을 증진시키는 일에 성경적인 분별뿐 아니라 정확한 기록과 신뢰할 만한 정보의 공유, 지역 간 협력이 필요하다는 그의 현실적인 인식을 보여 줍니다.
에드워즈는 부흥에 관한 소식을 지역 사이에 전달하는 방식에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거가 불충분한 소문이나 편파적인 보도는 부흥을 반대하거나 무분별하게 옹호하는 사람 모두에게 잘못된 판단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인쇄소와 소식의 유통에 접근하기 쉬운 보스턴의 목회자가 여러 지역에서 확인된 보고를 모아 매달 또는 보름마다 출판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목적은 선정적인 간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가능한 한 신뢰할 수 있게 전달하여 다른 지역의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격려받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저자의 최종 결론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부흥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허락하신 특별히 복된 시기라고 평가하면서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들이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고, 부흥에 참여한 사람들은 교만과 무분별함, 잘못된 신학과 부족한 자기 성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양편 가운데 어느 쪽의 승리를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한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회개와 연합, 올바른 수단의 사용이 이루어진다면 뉴잉글랜드의 부흥이 장차 더욱 영광스럽게 확장될 그리스도의 나라를 기대하게 하는 복된 징조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성령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져 온 땅에 빛과 거룩함, 평화와 기쁨이 확산되기를 소망하며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간구로 책을 마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마지막 기도는 부흥의 궁극적인 목적이 특정한 지역이나 사역자의 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책의 마지막에서 에드워즈는 적극적인 부흥 옹호와 엄격한 자기 비판을 함께 요구합니다. 부흥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만, 부흥을 증진하려 했던 사람들이 저지른 교만과 혼란 역시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일으키시는 은혜의 역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므로 누구도 자기 운동이나 체험을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교회가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기다리기를 소망하고,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주 예수께서 오시기를 바라는 기도로 글을 맺습니다.
전체 핵심 논지
에드워즈의 부흥 신학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와 성경적인 분별,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실제적인 순종의 책임을 함께 붙듭니다. 첫째, 죄인의 회심과 성도의 성화는 인간의 기술이나 종교적인 분위기만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둘째, 참된 부흥의 여부는 강렬한 감정이나 비범한 신체 현상에 대한 선호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성경의 진리와 그 열매를 통해 검토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참된 역사를 인정하는 일은 참여자들의 모든 경험과 행동을 무오한 것으로 승인하는 일이 아닙니다. 넷째,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성도들은 기도와 설교, 성례와 신학교육, 교회의 질서와 물질적인 구제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을 충실히 활용해야 합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경고는 분명합니다. 부흥에 나타나는 인간적인 오류 때문에 성령의 참된 역사를 거부해서는 안 되며, 성령의 참된 역사가 있다는 이유로 인간의 오류를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에드워즈가 추구하는 균형은 양쪽의 주장을 절반씩 받아들이는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은혜와 인간의 부패를 구별하고 참된 영적 생명이 더욱 성숙한 거룩함으로 나타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부흥의 결정적인 성과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례적인 현상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 그리스도를 높이는 믿음, 겸손과 온유,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선행에서 확인됩니다.
편집 주: 이 자료는 원문 전체의 세부 소제목과 모든 문장을 일대일로 옮긴 판본이 아니라, 앞서 밝힌 통합 원칙에 따라 상세 논증을 문단형으로 재구성한 연구 요약입니다. 역사적·성경적 사례와 중요 반론을 보강했지만 원문의 완전한 대체물은 아닙니다. 저자의 종말론적 추론은 그의 견해로 제시했습니다. 인물 소개의 기본 연혁은 예일대학교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센터, 보스턴대학교 역사선교학 자료, 프린스턴대학교 역사자료를 대조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