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특별한 영적 체험에 관한 간증이 이어집니다. 수많은 사람이 집회에 참석하여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감동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우리도 하나님께서 놀라운 부흥을 주고 계신다고 기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적인 감동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부흥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하는 일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참된 영적 갱신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며,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감정은 이러한 역사에 동반될 수 있지만, 그것이 부흥의 본질이나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 자신에게 옮겨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리스도의 구속보다 내가 받은 감동과 위로가 중요해지고,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보다 나에게 일어난 특별한 경험이 더 큰 권위를 얻으며, 교회가 함께 고백해 온 신앙보다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종교생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참된 부흥을 분별하려면 특별한 체험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를 묻기 전에, 그 체험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드는지, 아니면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높이도록 이끄는지 살펴야 합니다.
1. 부흥의 열기와 실제적인 영적 각성은 다릅니다
1990년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새로운 부흥에 대한 기대가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토론토에서 보고된 특별한 종교적 현상, 1995년 대학 캠퍼스에서 나타난 공개적인 죄의 고백과 영적 각성의 움직임, 플로리다 펜서콜라에서 시작된 대규모 집회가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러한 모임에 참석했고, 일부에서는 새로운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오순절 이후 가장 놀라운 영적 각성에 비견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부흥의 증거로 제시된 사건들은 다양했습니다. 프라미스 키퍼스(Promise Keepers)의 대규모 남성 집회와 워싱턴 집회를 향한 기대, 대학생들의 공개적인 죄 고백, 인종적 화해를 위한 노력,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기도와 금식 운동, 아프리카와 아시아 및 라틴아메리카에서 보고된 회심의 증가 등이 주목받았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새 천년의 도래를 앞둔 종말론적 기대도 이러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곧 세계적인 규모의 특별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한데 모아 곧바로 새로운 대부흥의 확실한 증거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인종적 갈등을 극복하려 하며,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에는 분명 긍정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현상이 동일한 성격의 영적 운동이거나, 성경적인 의미의 부흥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석자의 숫자와 집회의 규모, 감정적인 반응과 특별한 경험에 관한 증언만으로는 그 운동이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으며 사람들의 신앙과 삶에 어떤 열매를 남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동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분명하게 선포되었는가, 죄에 대한 참된 회개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깊어졌는가, 성도들이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 안에서 더욱 성숙해졌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종교적인 열기는 빠르게 확산될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의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구별을 잃어버리면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이 오히려 영적인 분별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을 찾아가고, 강렬한 경험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확신하며, 그 경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을 영적으로 뒤처진 사람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사람들의 기대나 열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여야 합니다.
2. 부흥주의는 어떻게 현대 문화와 결합하게 되었습니까?
미국 교회의 부흥주의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19세기 제2차 대각성운동 이후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의 영향을 받은 부흥주의는 미국 개신교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흥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해하기보다 적절한 방법과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집회 방식과 부흥을 위한 여러 방법론이 교회의 전도와 목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부흥주의의 문제를 피니의 영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20세기 후반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문화적 변화도 교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개인의 욕구와 만족을 중심에 두는 소비자 문화가 교회생활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상품과 서비스를 선택하듯, 교회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경험과 활동, 편리한 환경과 메시지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사역은 소비자가 선택하는 여러 종교적 상품처럼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과 구원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는 일이 된다면 심각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종교적인 경험과 위로를 얻는 장소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복음의 내용보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집회, 감정을 고조시키는 분위기,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들리는 메시지가 환영받습니다. 교회는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방법과 참여자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에 능숙해질 수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에는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종교 조직이 되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활동은 활발하지만 죄와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흐려질 수 있습니다.
교회의 외적인 성공과 영적인 건강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부흥을 판단할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만족을 제공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충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사람들을 세웠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3. ‘나 중심 세대’는 신앙의 목적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미국 사회에는 오랫동안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자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역사와 공동체,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을 잊고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주의가 사람들을 조상과 후손,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기 마음의 고독 속에 가둘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잊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후반 이러한 문화는 더욱 강력한 자기중심주의로 발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며, 내면에 숨어 있는 참된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사회가 부과한 제약과 과거의 영향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면 더 높은 차원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단순한 심리적 관심을 넘어 일종의 종교적인 탐구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톰 울프(Tom Wolfe)가 1977년에 발표한 「나 중심의 10년과 제3차 대각성운동」은 이러한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했습니다. 과거에는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만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꾸미고 변화시키는 데 많은 자원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경제적 번영이 확대되면서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외모와 성격, 경험과 생활방식을 계속 바꾸고 개선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연금술사가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 했다면,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문화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 사회와 과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을 깊이 탐구하면 본래의 참되고 소중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둘째, 그렇게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진리나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지점에서 자기계발과 자아 탐구는 종교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궁극적인 의미와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가 기독교 신앙과 결합할 때 위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과 주권 앞에 우리가 엎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실현을 도와주시는 분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사건보다 상처 입은 자아가 회복되고 개인적인 행복을 되찾는 과정으로 설명되기 쉽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보다 자신의 삶에서 만족과 성공을 경험하는 데 놓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적인 관심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얼마나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신앙생활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가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적인 영적 만족을 위한 수단처럼 취급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높이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일은 자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4. 개인적인 체험이 성경의 계시보다 중요해질 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실제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증언했으며,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이 사도적 증언을 통해 복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견한 비밀스러운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주신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일부 흐름에서는 이러한 객관적 계시보다 개인의 종교적 의식과 경험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보다 그 사건이 사람에게 어떤 종교적 의미를 주는지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무엇을 행하셨는가보다 그분이 인간의 종교적인 감정을 어떻게 일깨우셨는가에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신학이 바뀌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은 점점 희미해지고,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 신앙의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위험한 이유는 신앙의 판단 기준이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보다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내용을 앞세우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신앙적 결론을 내리면서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경험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는다면 교회가 함께 고백해야 할 객관적인 진리는 점차 약해집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며 성경의 권위와 역사적인 복음의 진리를 수호해 왔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20세기 전반의 자유주의 신학 논쟁과 이후 성경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도 역사적 복음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위에 세워져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20세기 후반 일부 복음주의 운동에서도 이전에 비판했던 주관주의와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특별한 계시와 영적 체험이 중요해지고, 역사적 교회의 신앙과 교리적인 정확성은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를 수호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감동과 개인적인 인도를 더욱 신뢰하는 모순이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영지주의와 일정한 유사성을 보여 줍니다. 영지주의는 특별한 지식이나 깨달음을 통해 영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현대의 일부 종교적 흐름에서도 성경과 교회가 공적으로 받은 진리보다 개인의 내면에서 직접 얻은 특별한 지식과 경험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두 현상이 역사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공개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보다 개인만이 소유한 영적 지식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공통된 위험이 있습니다.
신앙의 체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죄를 슬퍼하며 말씀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경험이 성경의 계시를 통해 형성되고 판단받는 대신,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바뀌는 데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새로운 복음을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어떤 구원을 이루셨는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더욱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떠난 영적 체험은 아무리 강렬해도 참된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5. 개인적인 신앙이 역사적인 교회와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대의 개인주의적 신앙은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역사적인 교회와 신앙의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사적인 경험으로만 이해한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느끼는가에 관한 문제가 되고, 교회는 그러한 경험을 돕는 여러 기관 가운데 하나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옮겨가고, 다른 모임에서 특별한 체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경험을 찾아가는 일이 신앙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보존해 온 교리와 예배의 질서는 낡고 답답한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새롭고 강렬한 경험을 제공하는 집회와 지도자는 특별한 영적 권위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과 함께 성장하는 일보다 어디에서 더 특별한 영적 경험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고립된 개인의 영적 경험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교회로 부르시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십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개인마다 새롭게 만들어 내는 진리가 아니라 모든 세대의 교회가 함께 받아들이고 지켜야 할 신앙의 기초입니다.
교회는 사도적 복음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도록 특별히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들의 증언은 교회가 계속해서 붙들어야 할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기초는 시대마다 새로운 영적 경험을 통해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신앙고백과 교리 교육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성경 위에 놓이는 새로운 권위가 아니지만, 교회가 여러 세대에 걸쳐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해 왔는지 보여 주는 중요한 증언입니다. 개인의 경험만을 앞세우면 누구든지 자신의 종교적인 감정에 따라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성경에 근거한 공동의 신앙고백은 교회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도록 돕습니다.
물론 역사적인 교회와 신앙고백을 존중한다고 해서 모든 전통이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관습은 계속해서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한 영적 감동만으로 과거의 교회와 그 신앙을 쉽게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앞선 세대의 성도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을 고백하며 신앙을 지켜 온 유산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부흥은 사람들을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떼어 놓는 운동이 아니라, 그 신앙의 진리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이끄는 역사여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진 교회라면 사도적 복음의 권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6. 특별한 경험을 찾아다니는 신앙의 위험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특정한 장소에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곳을 방문하고, 어떤 집회에서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 자신도 같은 경험을 얻고자 합니다. 그 체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특별한 경험을 추구하는 일이 하나의 종교적 의무처럼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도 강렬한 체험을 해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전에 경험했던 감동을 다시 얻지 못하면 신앙이 침체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질문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더 특별한 일을 경험할 수 있는가가 됩니다.
그 결과 구속과 칭의, 죄 사함과 회개처럼 복음의 중심에 있는 진리보다 개인적인 관계와 소통, 내면의 감동과 영적 경험을 강조하는 언어가 더욱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자랑하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관한 이해는 깊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특별한 경험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현상을 경험한 사람에게 영적으로 의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에는 분명히 경험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기쁨, 하나님과의 화평, 말씀의 위로,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귀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는 체험이 포함되지만, 체험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특별한 집회에서 무엇을 경험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감정의 강도에 따라 기초가 달라지는 신앙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 사역에 기초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경험에 대해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역사적 사실은 인간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효력을 잃는 것이 아니며, 강렬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경험이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소망은 우리가 어떤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7. 참된 부흥은 율법과 복음의 회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현대 부흥주의를 분별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 운동이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종교적 감동과 신비로운 경험을 추구하도록 만드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이끄는가? 개인의 영적 능력을 자랑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구원의 은혜를 더욱 높이게 만드는가? 사람들을 특별한 집회와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성경의 진리와 교회의 신앙 안에서 성숙하게 만드는가?
참된 부흥을 위해서는 율법과 복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인간의 죄와 불순종을 깨닫게 합니다. 복음은 그러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선포합니다. 율법의 빛 아래에서 자신의 죄를 알게 된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음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을 바르게 구별하면서 함께 선포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와 종교적인 성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구원의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진리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참된 부흥의 충분한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더 행복해졌거나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복음이 의도하는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영적 갱신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했는지 자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개인의 영적 성취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과 함께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부흥이 교회를 참으로 새롭게 한다면 성경의 권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존중받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복음의 진리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분명해져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깊이 연합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하는 운동이 이러한 방향과 점점 멀어진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신중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된 부흥은 새로운 체험으로 교회를 흥분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결론. 우리는 부흥을 원하는 것입니까,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부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복음의 진리가 흐려지며, 성도들의 신앙이 세상의 가치관에 쉽게 흔들리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더욱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모이는 특별한 집회입니까?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영적인 감동입니까? 우리 교회와 사역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권위를 얻고,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며, 성도들이 진리와 거룩함 안에서 새로워지는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다면 그 일은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하게 부흥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모든 영적 현상을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운동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흐리게 하고 성경의 권위를 약화한다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흥을 사모하는 열심과 성경에 근거한 분별력은 결코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신앙의 중심에 놓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리스도의 구속보다 자신의 체험을 더 많이 이야기하며, 말씀의 권위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동을 더 신뢰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중심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새로운 영적 유행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사도들이 전한 신앙이고, 그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입니다.
부흥을 구하는 기도는 자신의 체험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서 시작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며, 성령께서 죄인을 회심시키고 교회를 말씀 안에서 새롭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날 때 가장 높임받아야 할 분은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체험을 전하는 유명한 지도자도 아닙니다. 오직 죄인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영적 경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돌이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가를 묻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놀라운 구주이신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체험을 했는지를 자랑하기보다 성경이 전하는 복음을 충실하게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흥의 중심에 우리의 감동과 만족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시 회개해야 할 이유입니다. 참된 부흥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원문 및 편집 안내
존 H. 암스트롱(John H. Armstrong), 「Revivalism and the “Me” Generation」, Modern Reformation, Vol. 7, No. 4 (July/August 1998). Monergism 재수록. © 1998, 1999 Alliance of Confessing Evangelicals.
원문: https://www.monergism.com/revivalism-and-me-generation
이 글은 1990년대 미국의 부흥운동을 배경으로, 현대 부흥주의에 나타난 개인주의와 종교적 소비주의, 주관적 체험의 절대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의 약화라는 문제를 분석한 글을 재구성한 상세 요약입니다. 피니 이후의 부흥주의 역사, 미국의 ‘나 중심 문화’, 객관적 계시와 개인적 체험의 구별, 사도적 복음과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 율법과 복음의 회복이라는 원문의 핵심 논증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부흥 프로젝트